▲만해 한용운 문학제 현수막만해 묘소에서 기일에 맞춰 직접 연 문학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종찬
이날 낮 3시 30분에는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로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고 <향약집성방>을 우리말로 옮긴 서거정(1420~1488) 시비가 세워진 사가정 공원에서 문학in 대표 이소리 시인 '인사말', 고산돌 시인 '행사내용 발표'에 이어 용마산 시비 산행이 이어진다.
낮 4시 30분에는 만해묘소에 모여 '추모제'를 시작으로 박희호 시인 '인사말', 유시연 작가 '만해 한용운 약력소개', 정동용 시인 추모시 '님의 침묵' 낭독, 박광배 시인 신작 추모시, 이산하, 김이하, 조길성 시인 등이 함께 토론하는 '만해 한용운 삶과 문학 세미나'가 1시간 동안 펼쳐진다. 저녁 6시에는 시인 박인환, 방정환 등 묘소기행으로 이번 행사가 마무리된다.
'문학in' 유시연 편집총주간은 "추모제가 끝난 뒤 행사에 참여하신 분에게는 떡과 막걸리, 부채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며 "이날 행사가 끝난 뒤 하산해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사가정역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문학in 정기회의'도 함께 열린다"고 덧붙였다.
조선총독부 꼴보기 싫어 집조차 반대방향인 북향으로 지어 만해 한용운 선생은 청주가 본관으로 3.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다. 선생은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집조차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받지 않았다. 그는 친일로 마음을 바꾼 최남선이 한용운과 가까운 사이임을 내세우자 "'최남선'이라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이미 장례를 치러서 당신은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열네 살이 되던 해인 1892년에 전정숙과 결혼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인 1894년부터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8세 때인 1896(또는 1897)년에는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떠돌며 수년 동안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가 출가한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때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힘겨운 역사란 소용돌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어림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