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쁜 남자 신드롬이란 것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 아류로 차도남이란 개념이 있긴 하지만. 여성들이 나쁜 남자에 열광했던 이유는 뭘까? 그건 '그래도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란 믿음이 아니었을까?
성장 배경 혹은 유년시절 마음의 상처로 인해 거칠어진 그의 성격이 마치 로션을 바르지 않은 피부라도 되는 양 어루만질 수 있을 거란 너는 펫스런 마인드부터 나쁜 남자라는 탈 속에 숨은 그 순수한 영혼을 그녀 자신만이 끄집어낼 수 있을 거라는 그 귀여니스런 오만함까지. 아마도 모성애를 갖춘 그네들이기에 그런 판타지를 창조하는 지도 모르겠다. 남자인 필자의 입장에선 나쁜 여자란 그냥 나쁜 年일 뿐이고 나쁜 남자란 주먹다짐이 오갈 수컷일 뿐이기에.
단편적인 예를 들었지만 우리들은 흔히 모든 악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악은 무섭지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악은 애수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믿음으로 악에 가까운 혹은 물든 사람들을 교화시킬 수 있다는 전제하에 다시 사회로 복귀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그런 대중들의 믿음을 배반하는 개념이 등장했다. 바로 사이코패스다.
흔히 연쇄살인마와 동의어로 쓰이곤 하는 그네들에게 살인의 이유는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한다면 그들은 웃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마도 기분 탓이겠죠."
성장배경, 콤플렉스, 유년시절의 트라우마 혹은 정신질환등은 그들의 형량을 낮추는 법률적 소인일 뿐 그들의 악을 설명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렇듯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사회에는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당혹스럽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 아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질문에 대답을 이 좀비라는 소설에서 조금은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호러무비나 공포소설을 좋아해 좀비라는 제목에 이끌려 본의아니게 접하게된 책이었긴 하지만 말이다.
애초에는 좀비란 제목에 낚인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도중에 닫진 않았다. 그 이유는 제프리 다머라는 연쇄 살인범의 실화를 기초로 했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이 책을 쓴 조이스 캐롤 오츠란 작가가 여자란 점이었다. 그게 뭐가 특별하냐고? 글쎄. 굳이 말하자면 희소성이라고나 할까? 사이코패스에 관한 많은 책을 읽어봤지만 여자가 쓴 책은 처음이었으니까. 게다가 앞에서 말했듯이 남성과는 관점이 다른 여자이기에 어떠한 관점으로 이 절대악을 서술했을지도 꽤 궁금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여자라는 느낌을 단 한번도 받지 못했다. 표현하자면 소주 한병을 깐 뒤 안주가 없어서 북어포대용이라는 기분으로 소주 한 잔에 이 책을 뜯어 한 장씩 한 장씩 목구멍으로 구겨넣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그녀의 글은 목이 막힐 듯 갑갑하고 건조했다. 게다가 이 문체의 장점이라고 해야 하나? 이 책은 제프리 다머의 소설 속 인물인 Q_P_의 관점으로 서술되어 있어 그의 살인 과정뿐 아니라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역겨운 욕구들은 필터링없이 그대로 전달해 그야말로 독자를 공범의 입장으로까지 만들어준다.
아, 이 책을 마치고 난 이 상쾌한 기분이란... 퉷!!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서서히 잔혹함과 역겨움의 물이 빠진 건조함이 머릿속에 남으며 묘한 기분에 찾아왔다. 그것은 슬픔과 비슷하지만 그 책 속에 나오는 피해자, 가해자 모두에 대한 감정이입은 아니었고, 공포를 느꼈지만 그 역시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문득 왜 책 제목이 좀비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Q_P_가 피해자들을 납치해 경안 뇌엽 절제술로 만들려고 했던 존재가 좀비였다. 달리말해 이 책에서 말하는 좀비란 인위적인 뇌절제술로 자아를 박탈당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Q_P_ 그 역시 좀비였다고 말이다.
인위적으로 자아를 박탈당한 사람과 달리 이미 그는 자신의 본능과 욕구를 절제하고, 타인이 느낄 감정과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자아가 결핍된 인간이었다. 뇌수술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이를테면 그는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바로 동물과 인간을 구분지을 수 있는 그 기준을 상실한 어쩌면 영혼이 없는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결국 이 책의 이야기는 인간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 말이다. 자신의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이 아닌 본능과 욕구라면 그 역시 좀비와 다르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좀비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끔 우리는 버릇처럼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내 마음 나도 모르겠어."
그런 것 같다. 우리들이 사이코패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듯 우리 안에 있는 본능과 욕구의 목적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 책은 인간 중심의 천동설에 빠져있던 사람들에게 영혼 중심의 지동설을 안겨준다. 하지만 아직도 천동설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녀에게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손가락질하며 심판을 하려 할지 모르겠다. 그런 부담때문인지 그녀의 글에서 주인공에 대한 감정은 거의 느낄 수 없다. 단 한 구절만 빼고.
마치 그 구절은 종교재판에 소환되어 교회의 겁박으로 스스로 지동설을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갈릴레이의 중얼거림을 연상시켰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바로 이 책의 맨 마지막 장, 마지막 글이다.
"어머니가 전화해서 메시지를 남겼다. 자동응답기 테이프가 망가져서 메시지 대부분이 지워졌다. 아마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에 오겠느냐는 얘기겠지."
필자는 이 구절에서 인간 본연의 감성을 느낄 수 없는 불구자의 담담한 고백을 엿들은 것만 같았다. 너무 쓸쓸하고도 처연했다. 어떠한 형용사와 부사도 덧붙이지 않은 구절이었는데도 제임스 캐롤 오츠의 감성을 이 구절에서만큼은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어두운 본성을 꺼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아마도 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 바깥에 있는 것 같다. 궁금하신 분은 책의 뒷표지에 빨간 글씨로 스여진 문구를 읽어 보시길 바란다. 아마도 그 문구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독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포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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