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 달 말에 펴낸 '과잉교육' 보고서.
삼성경제연구소
재미있는 보고서를 봤다. 삼성경제연구소(SERI.org)에서 펴낸 <대학에 가지 않아도 성공하는 세상>이라는 보고서다. 얼마나 속 시원한 제목인가. '교육'이랍시고 유치원 때부터 서로 할퀴고 물어 뜯도록 만드는 이 지옥 땅을 비추는 한 줄기 빛 같지 않은가.
제목도 관심을 끌었지만, 더 흥미로운 건 보고서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짐작할 수 있듯, 대기업 연구소에는 '가방끈 긴' 사람들로 가득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공부도 해 본 이들이 '공부해봐야 별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걸까. 이유야 어찌됐든 공부 깨나 했다는 사람들이 나서서 '대학 가지 않아도 성공하는 세상'을 꿈꾼다니 반갑다.
그래서였을까. 살인적 경쟁교육을 비판해 온 진보언론이 앞다투어 보고서를 대서특필했다.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보수언론과 정부까지 나서서 극찬을 쏟아내는 걸 보니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경쟁만이 살 길'이라며 학생들을 들들 볶아 학교 창문도 25센티미터 이상 못 열게 만든 장본인들 아닌가. '살 길'이라던 경쟁교육이 '못 살 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걸까?
그럼 그렇지. 수수께끼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삼성 보고서가 나온 직후 보수 언론에 이런 제목의 기사들이 실리기 시작한 것이다.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대학을 반으로 줄여라" 대학을 나와야, 그것도 '명문대'를 나와야만 사람 취급 받는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둔 채 대학을 반으로 줄이면 어떻게 될까? 창문 틈을 25밀리미터로 좁혀도 자살을 막지 못하게 될 것이고, 아이를 안 낳는 게 자녀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배려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학은 절반만 주는 게 아니라, 아예 사라질 것이다.
문제는 대학뿐 아니라 나라도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옥스포드대 데이비드 콜먼 교수의 분석이 그렇다. 이 인구전문가의 우려대로라면, 한국이 출산율을 높이지 못할 경우 자연소멸하는 첫 국가가 될 것이다. 작년 1월 14일 자 <조선일보>가 여성들에게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묻자, 20대 여성 47%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비용'의 가장 큰 몫은 사교육비다. 19%는 '아이를 고통스러운 세상에 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보수가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나라가 없어지는 걸 바라지는 않을 터이다. 그저 이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대학 등록금 못 내는 가난한 학생들은 '반값 등록금' 운운하지 말고 그냥 취직해라.' 언제는 '뜨거운 교육열'이 기회라더니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의로 작성한 보고서를 보수 언론과 정치권이 악용하고 있는 걸까? 사실을 말하면, 보고서가 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부와 기업의 입맛에 맞게 짜맞춘 보고서다. 정부를 보라. 언제는 "천연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고급 두뇌 자원만이 살 길"이라며 고등교육을 강조하더니, 이제 대졸자를 책임질 수 없게 되자 '대학엔 왜 갔느냐'고 국민들을 나무란다.
한미무역협정(FTA)을 추진할 때만 해도, '대학진학률이 82%를 넘을 정도로 뜨거운 교육열'이 고급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이라고 말하곤 했다. FTA가 '고학력 인력'에게 일자리를 가져다 줄 거라는 약속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협정이 발효되고 나니 갑자기 '82% 넘는 대학진학률'이 '기회'에서 '문제'로 돌변한다.
정부는 대학이 너무 많아 문제란다. 그렇다 치자. 그 '부실대학'을 전국에 깔아 놓은 게 누구인가. 새누리당의 전신 민자당이 1995년 '5.31 교육개혁'을 추진하면서 대학설립과 정원을 자율화한 탓이다. 그 전에는 교육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만 대학을 세울 수 있었다. 이 자율화 정책 덕에 김영삼 대통령 집권기에 대학진학 증가율이 사상 최대로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