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여러 사람과 자신의 사생활을 공유한다.
facebook
국가권력이 이러한 형태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은 전통적인 전체주의 국가의 감시형태다. 그렇다면 독재정권이 끝나고, 사회가 민주화된다면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자연스럽게 보장되는 것일까? 물론 비밀경찰이 해체되고,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통제가 강화된다면 전통적인 방식의 국가 감시는 약화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문화연구자 엄기호는, 그런 민주화는 또다른 방식의 국가 감시로 이어지게 되는 역설을 품고 있다고 본다. 아주 민주적인 방식의 감시사회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만연한 모습이다.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CCTV설치를 요구하고, 성범죄자를 넘어서 강력범죄자들에게도 전자발찌 같은 추적장치를 채우자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모든 소비 내역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신용카드는 편리함의 이유로 선호되며, 이 내역이 국세청으로 일괄 전송되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이는 많지 않다. 학생들의 모든 정보를 집적하는 네이스(NEIS)에는 학생 각각이 읽은 도서목록까지 들어가지만, 모두들 한 권이라도 더 집어넣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불안이 야기하는 감시에 대한 복종이는 민주화 자체가 낳은 특징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탈권위주의 과정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는 게 맞다. 신자유주의는 '배제'를 그 본질적 속성으로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동과 시장에서 배제될 공포 하에 놓이고, 국가의 시장에 대한 통제와 시민들에 대한 보호는 극단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 배제의 불안감이 자발적인 감시를 요구하는 동력이 된다.
이 불안감은 국가에게서 창출되는 측면도 있다. '작은 정부'와 '큰 시장'라 명명되는 신자유주의 구도에서 국가는 스스로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악마화된 타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국가는 테러리스트,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학교폭력 가해자 등을 악마화된 대상으로 만들어내고, 이들이 사회를 좀먹고 있으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이미 불안에 시달리는 시민은 그 외침에 동조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국가에게 스스로의 방문을 활짝 열게 된다.
최근 이슈화된 학교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이러한 구도가 노골적으로 확인되는 사례이다. 학생들의 안타까운 자살이 이어지자 정부와 언론은 학교가 마치 무법천지의 공간이었던 것처럼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래된 학교폭력의 구조적 문제들을 간과된 채, '일진'이라 불리는 가해자들을 부각시키고 이들에게 모든 학교 폭력의 책임을 전가한다. 이제 학교폭력의 문제는 일진을 어떻게 색출하고, 처벌할 것인지로 귀결된다. 이를 위해서 학부모든 교사든 학교에 더 많은 감시, 더 많은 경찰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한 불안과 공포로서 받아들인 감시와 개입은 해당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또한 결국 우리 스스로의 공간을 위축시킬 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러한 방식의 감시에 저항하는 것은, 독재권력의 사찰에 저항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이 책이 제안하는 저항의 방식은,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방식이다. 바로 민감한 시민의식이다.
익숙함이 만든 '침해'에 민감해지기숙명여자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홍성수는 과연 '감시'라는 것이 우리를 더 안전하게 하는지 차분하게 생각해보자고 한다. CCTV는 우리를 지켜주는가? 홍 교수는 도서관에서 도난사고가 많이 난다면, CCTV로 개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리마다 작은 사물함을 설치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방식이 아니냐고 묻는다. 실제 경험적인 연구 속에서도 CCTV로 인한 범죄율 감소는 검증되지 않은 반면, 보다 많은 가로등 설치의 효과는 명확하게 검증되었다.
진정 무엇이 도난사고를 줄이고, 범죄율을 줄일지에 대한 냉정한 판단, 그리고 그 판단 과정에 개개인의 사생활 보장이 적극적으로 고려되는 것. 이는 바로 감시사회에 저항하는 민감한 시민의식의 시작이다.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한상희 교수는 전 국민이 고유의 번호 하나로 관리되는 주민등록번호의 섬뜩함을 지적하면서 익숙함을 의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도 무심코 주민등록증을 잘 내어놓는다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그것이 익숙하니까 몸에 배에 있으니까 전 세계에서 유래 없는 감시 시스템인 주민등록증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익숙한 주민등록증의 위험성을 자각하고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것, 그 불편함이 주는 자유와 행복을 상상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감시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사생활의 자유를 풀어서 이야기하면 혼자 있을 권리, 보이지 않을 자유, 사라질 자유, 물러날 자유라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보장된 자기만의 방, 그리고 언제든 그 방 속으로 들어가 홀로 쉬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사생활의 자유, 그리고 프라이버시의 보장이다. 사실 이는 독립된 주체인 '개인'이 존재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자유이다. 자기만의 방이 없다면 자기만의 생각도,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자신의 행동도 존재하기 어렵다.
감시사회는 그런 자유가 박탈된 사회를 의미한다. 2012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기만의 보장된 방이 있는가? 불안 속에서 자신의 방 열쇠를 반납한 채 허망한 안전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세상에서 가장 많은 개인정보를 이력서에 적어 내면서도 취직하지 못해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그런 이력서가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고 하는 주장은 한가한 이야기로 취급될 수도 있다. 서평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에 대해 개인이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순진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물러날 곳이 없는 존재에게는, 자신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숨길 곳이 없는 존재에게는, 끝 없는 불안이 반복될 뿐이다. 우리가 진정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감시의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많아진 CCTV와 일기장 공유... 좋은가요?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