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협객, 구라의 원조” 배추가 돌아왔다!>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박재동 화백
김민관
방배추는 "한국전쟁 즈음에 휴교되어 학교가 거의 없었고 학생들도 없는 가운데, 서울 종로라든가 그 교외를 빌려서 운영되던 남녀가 함께 다니던 중학교 시절에 밀짚모자를 쓰고 '게다짝'(일본 사람들이 신는 나막신을 낮잡아 이르는 말)을 끌고 다녔다"며 "그때 배추장수를 닮았다고 해서 배추가 됐다"고 자신의 별명에 얽힌 유래를 설명했다.
방배추 가족은 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일제강점기 때 부유한 편이었다. 유치원도 다녔고, 또 당시 귀한 사탕도 쉬이 먹을 수 있었다.
방배추는 또한 운동에 소질이 있었단다. 소학교 시절 멀리뛰기 선수, 수영 단거리 선수 등으로 전국 체전에 출전했다. 소학교 5학년 당시 중학교 3학년 세 명이 다른 학생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때려 꺾었고, 이도 부러뜨렸단다. 더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다음부터인데, 방배추에게 맞은 학생들의 부모들이 따지러 저녁에 방배추의 집에 왔는데 방배추의 아버지가 대뜸 그들 중 한 아버지의 뺨을 때리더니 소학교 5학년에게 맞고 와서 따지는 게 창피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무안을 줬다고 한다. 그러자 피해자 부모들은 미안하다며 돌아갔다고 한다.
방배추는 "타고난 힘만 갖고는 싸움을 완전히 잘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수련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궁중 무술과 레슬링을 수련했다. 누군가를 때려 경찰서에 갔는데, 유도를 가르치던 강력계 형사가 자신과 겨뤄 이기면 놔준다고 해서 제압했다는 일화도 풀었다.
당시 배추를 사칭하던 사람도 많았다. '17대 1'이라는 말이 흔히 쓰이는데, 아마 그가 실제 싸웠던 것 중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결국 그는 패했고, 훗날 그가 어떤 기자랑 이야기를 하다 '17대 1'이라는 말이 퍼졌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방배추는 시라소니와 비견되는 시대의 협객으로 이름을 떨쳤다.
무술은 막고 때리는 것을 번갈아가면서 대련을 하지만, 싸움은 맞는 동시에 때려야 하고 피하면서 또 때려야 한다. 또 무술과 달리 룰이 없다. 어디서 공격이 시작될 지, 막상 싸워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그는 프랑스에서 싸운 경험도 이야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 사람은 체구도 크고 힘이 세 한국에서 맞붙었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배추와 맞붙은 자는 400명 정도 되는 조직원을 거느린 사람이었는데 근접전이 벌어지자 방배추는 상대를 박치기로 쓰러뜨렸다. 그래도 자신을 붙잡고 늘어지는 그의 눈에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갖다 댔고 손이 쑥 들어갔다고 했다.
이런 건 무술 교본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란다. 그런데 눈 안에 집어넣은 손이 그렇게 뜨끈할 수 없었단다. 나중에 조직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친한 사이가 됐다고.
또 한 명의 원조 구라 백기완 선생(이하 백기완)과의 인연도 재밌는 부분이다. 친구가 여러 모로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백기완을 찾아 갔을 때 백기완은 '너 한 번에 몇 명이나 때려눕히냐'고 물었단다. 그래서 방배추는 '10명 정도는 되겠지'라고 했는데 돌연 백기완이 일어나 자신의 귀싸대기를 때렸단다. 백기완은 '조무래기 애들하고만 싸우느냐'며 '너랑은 안 논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만약 아팠으면 싸웠을 텐데 아프지 않았고, 그냥 가소롭게 생각돼 돌아왔는데, 일주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단다. 나중에 방배추는 백기완을 다시 찾아갔다. 그 둘은 친구가 됐다. 그는 백기완을 두고 '친구지만 꼼짝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싸움도 잘하고 호방하고 뚝심 있게 살아왔지만, 방배추는 유독 여성과의 로맨스는 약했다. 여자에게는 소심했던 것이다. 유독 전쟁 중 북한에서 피란민으로 내려온 아가씨에게 부모에게 데려다 주고 싶은 마음과 함께 특별한 감정이 생겼는데, 방법이 없어 지도를 그려 찾아주고자 했다. 그러다 그만 휴전이 돼 버렸고, 결국 아가씨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방배추는 당시 속이 많이 상했단다.
가난의 끔찍한 고통을 대면하다방배추는 장충동으로 빚을 받으러 갔다가 당사자가 돈이 없다며 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 긋는 것을 보고, 현실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가난이 이토록 무서운 것임을 절감했다고 한다. 현재 방배추는 경복궁에서 문화재 지도위원으로 궁궐 안내 지도를 하지만, 소박하게 낮춰 스스로를 소위 '야간 경비를 본다'고 설명한다. 어쨌거나 웬만한 사람이면 야심한 시각의 이곳의 무서움을 견디지 못한다고. 싸움에서도 전연 피하는 게 없었던 그로서는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 평생 가장 무서운 대상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방배추는 이론만 있는 사회주의자들을 매우 싫어한다. 이들은 방배추 말에 따르면 망치질 한 번도 안 하고, 노동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 이들은 이름 없는 노동자로 사느니 형무소에 가는 게 낫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18세에 방배추는 순천역 부근에서 2년동안 돼지장사 등을 해 동대문시장에서 150만 환을 벌었다. 당시 30만 환이면 가게 하나를 살 수 있었다.
'고문',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