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가 20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 재조사 요구서'를 청와대에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로 향하다가 경찰들에 의해 막히자, 고개를 숙이고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날 장하준기념사업회와 유가족은 "최근 묘소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37년 만에 처음으로 검사한 결과 명백한 타살의 증거가 드러났다"며 "국가가 국가의 책임을 다하는 자세로 이 사건의 진상규명과 재조사에 착수할 것"을 요구했다.
유성호
부검 못하다가 이장 과정에서 유골 검시이어 장씨는 조사가 끝났는데 왜 또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항간의 말은 사실 관계를 모르고 하는 "개념이 없는" 소리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도 부검이 고려되기는 하였으나 두 가지 이유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고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을 비롯한 장준하 선생의 지인들이 부검이 누가 될 것이라며 반대했고, 유골이 혹시 진토가 되었다면 부검이 불가능할 것이라 봤기 때문이라는 것. 결국 진상규명위원회는 '규명 불능'으로 조사를 매듭지었다.
그러한 규명 불능의 조사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은 작년 5월의 일이다. 당시 비가 많이 와서 장 선생의 묘가 붕괴되었던 것. 축대가 무너지고 파손이 심해 유족들은 보수 비용을 상당히 예상하던 차였다. 그 와중에 파주 시장으로부터 파주에 후손들에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장 선생의 추모공원을 만들어 장 선생을 모시고 싶다는 제안이 왔다고 한다. 그 결과 올해 추도식을 앞둔 8월 1일 이장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장씨는 그간의 의문 해소를 위해 이장을 하는 김에 유골 검시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법의학자들과 함께 시신 수습 과정을 참관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장 선생의 유골이 잘 보전된 것이 확인돼 법의학자의 눈과 손을 통한 수검을 진행하면서 외상에 의한 것으로 의심되는 두개골 함몰 상흔을 발견하였다.
장씨는 타살의 심증으로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당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가 발동되는 과정에서 장 선생님과 박 전 대통령의 관계는 극악으로 치달았다"는 것과 "사건 당시 목격자의 신원과 증언, 정황, 현장 상태, 시신 상태 등에서 일관성이 의심되었다"는 것.
장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했고, 그 뒤로는 유신독재 반대에 투신하는 등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아도 여러모로 대척점에 섰던 인물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점에서 독재 정권이 정적을 제거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 장씨는 죽음 자체를 들여다보아도 의심 가는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선 머리 뒤 상흔은 자연적으로 발생하기 어려운 형태라는 것이 법의학자들의 주장이고, 머리에 그 정도 외상이 있다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야 하는데 다른 상처가 없었다는 것. 추락 현장에 굉장히 큰 돌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팔다리 등이 멀쩡했다는 점에 의혹이 들 수밖에 없다고 장씨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