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0억 국가곡물 조달시스템, '식량자주화' 가능할까?

올해 목표량 92만 톤이지만 실제 수입된 물량은 없어

등록 2012.08.23 21:27수정 2012.08.2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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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미국의 극심한 가뭄으로 곡물 가격이 급등했다.

미국의 극심한 가뭄으로 곡물 가격이 급등했다. ⓒ 연합뉴스 /EPA/JUSTIN LANE


'세계의 농장'인 미국에 폭염이 지속되면서 곡물가격이 폭등하자 나라마다 식량확보 대책 마련에 고심이다. G20은 오는 27일 식량 관련 실무자들끼리 한 차례 전화회의를 가진 후 9월과 10월에는 곡물가 관련 연속 비상 대책 회의를 가질 예정이다.

사료곡물을 포함한 식량자급율이 26.7%에 불과한 한국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2011년부터 '국가곡물 조달시스템' 구축 사업을 진행해왔다. 시기는 좋았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식량 자급율 55%를 목표로 농식품부가 예산 642억 원을 투자한 이 대규모 사업의 실제 성과는 지난해 콩 1만 1000톤을 들여온 게 전부다. 일각에서는 조달시스템 구축 자체가 표류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혈세 750억 원 들어가는 국가곡물 조달시스템, 미국서 표류중?

국가곡물 조달시스템 구축사업은 미국, 브라질 등 해외 주요 농산물 산지에서 직접 곡물자원을 매입해 식량을 국내에 안정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추진된 사업이다. 농식품부 예산으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아래 aT센터)가 2011년부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1년 사업비는 200억 원이다.

시작은 좋았다. aT센터는 출자받은 사업비의 일부로 삼성물산, STX, 한진그룹이 참여한 민간 합작투자를 통해 지난해 4월 시카고에 국제 곡물회사인 'aT그레인 컴퍼니'를 세웠다. 2015년까지 전체 수입곡물 중 30%를 자체 유통망을 통해 도입한다는 목표도 내놨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 사업의 핵심은 농장에서 산 곡물을 저장·가공·운송하는 현지 시설(엘리베이터)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래야 원할 때 필요한 양의 곡물을 배에 실어 국내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효율성을 위해서는 최소 10기의 산지엘리베이터를 보유한 기업을 인수해야 한다는 게 aT센터측의 분석이다. 농식품부가 책정한 예산의 대부분도 10기의 산지 엘리베이터(저장·가공 시설)와 1기의 수출 엘리베이터(항만 운송 시설) 인수 대금이었다.


정부가 정한 조달시스템 구축 완성 시한은 2015년. 이때까지 식량자급율 55%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산지 엘리베이터를 조속히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aT센터가 확보한 물량은 전무한 상태다. aT센터의 한 관계자는 "최근 곡물가격이 높고 시장이 호황이다 보니 산지 엘리베이터를 가지고 있는 기업들의 자산 가격이 올라 검증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해명했다.

곡물을 국내로 들여올 때 필요한 수출 엘리베이터도 마찬가지다. 이 관계자는 "현재 시장이 활황이라 수출 엘리베이터 업체에 지분 참여를 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사기는 사야겠는데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가격이나 조건이 맞지 않아 못 사고 있다는 얘기다.


"단기 손해 감수하고 장기적인 시각으로 전략 세워야"

a  국회예산처가 낸 농식품부의 '국가곡물 조달시스템 구축사업' 결산 보고서. 2011년 예산 중 31억 원 만을 사용했다.

국회예산처가 낸 농식품부의 '국가곡물 조달시스템 구축사업' 결산 보고서. 2011년 예산 중 31억 원 만을 사용했다. ⓒ 국회예산정책처


aT센터의 엘리베이터 업체 인수와 운영에는 민간 합작투자 세 곳이 각각 20%씩 지분을 가지고 투자에 참여하게 된다. aT센터까지 네 곳의 자본을 합치면 1784억. 이중 순수 엘리베이터 업체 인수금은 1000억 원 정도다. 국가곡물 조달시스템 구축사업과 관련 aT센터가 쓸 수 있는 돈은 정부지원금 750억 원. 민간업체의 동의 없이 혼자서는 인수가 불가능하다.

민간 업체가 참여하기 때문에 수익성 문제가 걸려서 사업이 늦어지는 건 아니냐는 질문에 이 관계자는 "아무래도 민간 업체에서는 수익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민간업체의 참여 필요성에 대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우선 정부 출자금만으로는 자금이 부족하고, 인수를 위해서는 기업 실사 같은 작업이 필요한데 그런 분야에서 민간업체가 가지고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민간업체와 함께 현지에서 인수할 만한 업체를 발굴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민간업체의 설명은 달랐다. 삼성물산 홍보팀의 한 관계자는 "현재 추진 상황은 현지에 사무실 하나 내고 스터디(공부)하는 정도"라고 밝혔다. 그는 "모든 일은 aT센터가 중심이 되어서 진행하고 있다"면서 "STX나 한진 같은 민간 업체들이 합작하게 된 것은 물류 운송이나 판매 같은 각각의 전문 분야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시기를 정해놓고 할 사업은 아닌 것 같다"는 말도 했다. 현지 업체 인수가 쉽지 않아보이는 이유다.

이렇게 사실상 국가곡물 조달시스템 구축에는 별다른 진척이 없는 가운데 올해에도 aT센터에는 442억 4000만 원의 세금이 출자됐다. 국세가 들어가는 사업이지만 사업 계획도 '아니면 말고' 식이다. aT센터가 자체적으로 내놓은 올해 곡물 수입 목표량은 92만톤이지만 현재까지 실제로 수입된 곡물은 전혀 없다. 지난해에는 목표로 잡았던 10만 톤 중 콩 1만 1000톤만 수입됐다.

내년에 농식품부에서 108억 원을 추가로 출자하면 당초 예정됐던 정부 지원금 750억 원은 모두 지급된다. 2014년 부터는 aT센터가 매년 20억 원씩 운영비를 자체 부담해가며 이 사업을 이끌어야 한다. 김한호 서울대 농경제학과 교수는 "2008년 곡물파동 이후 곡물 업체들 자산가격이 상당히 올랐다"면서 "현지 엘리베이터 업체의 자산가격이 문제라서 인수를 못 하고 있는 거라면 계속 인수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교수는 한국과 식량자급율이 비슷하지만 일찌감치 해외 시장을 개척한 일본을 좋은 예로 들었다. 일본은 1979년 사료곡물의 최대 수요자단체인 '젠노'을 중심으로 민간 대기업들이 참여해 '젠노 그레인 코퍼레이션(ZGC)를 만들었다. 젠노는 한국의 농협중앙회와 비슷한 회사다. 김 교수는 "일본의 정부와 회사들은 단기적인 수익보다는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장기적인 시각으로 전략을 세웠다"고 지적했다.

농식품부, '사업계획 미비' 지적당하고도...

국가 식량안보와 직결된 계획이지만 정부도 확고한 계획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농식품부는 이 사업과 관련 예산과 사업 내용을 총 세 차례에 걸쳐 변경했다.

2011년 예산안에 수립된 국가곡물 조달시스템 구축사업의 총 예산은 1010억 원. 2011년부터 10년에 걸쳐 매년 1기씩 산지 엘리베이터를 짓는 게 사업 내용이었다. 그냥 정한 내용도 아니었다. 농식품부와 aT센터는 이 계획을 짜기 위해 2010년 2월부터 9월까지 전담팀을 꾸려 현지 조사 등 사전 준비와 검토과정을 꾸준히 거쳤다.

그러나 이렇게 세워진 계획은 2011년에는 산지 엘리베이터 10기에 수출엘리베이터 1기를 인수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총 예산 지원액도 1204억 원으로 불어났다. 이어 올해 5월쯤 수립된 중기재정계획에서는 사업을 미국 시장에 집중하는 것으로 내용이 바뀌면서 총 예산이 750억 원으로 줄어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전 준비과정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사업계획 준비가 부족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국회 예산정책처에서는 이에 대해 '2011년 회계연도 결산 분석' 자료에서 "사업계획 미비로 재정집행 효율성이 저해됐다"고 평가했다.

aT센터의 현지 사업이 지지부진하자 농식품부는 최근 국회에서 질타를 받으면서도 aT센터의 사업 자체에 대해서는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반응이다. 서정호 농식품부 식량산업과 사무관은 "현지 기업을 인수하는 일이 기한을 정해놓고 나설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다"라면서 "지금 기존 사업방향을 전환하는 쪽으로 다시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가곡물 조달시스템 #농식품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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