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해진 봉숭아꽃밭경비실 옆에 화단.
김관숙
여름 내내 경비실 옆 화단에는 봉숭아꽃들이 가득히 피었습니다. 여자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빨강 봉숭아꽃을 한 주먹씩 따가지고 돌아서도 다음 날이면 또 화려하게 가득히 피어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푸르디푸른 이파리에 흰 곰팡이가 슬기 시작하더니 이파리 색이 누우래지고 거미줄이 진을 치기까지 했습니다. 화단이 초라해 지자 아무도 바라보는 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화단이 빨리 정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화단 앞길을 무심히 지나가고 있는데, 나를 아는 체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에 사시는군요!"돌아보니 지팡이를 짚은 키가 작은 할아버지입니다. 바로 그 초라한 화단 앞에 서있습니다. 아는 분입니다. 누군가가 거기 서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로 경계석을 따라서 지나가느라고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나도 인사합니다. 그뿐, 나는 그대로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순간 지팡이가 딱 하고 내딛는 소리가 났습니다. 지팡이 소리가 아주 컸습니다. 걸음을 서두르는 소리입니다. 아니 '나랑 같이 가요' 하는 소리입니다.
할아버지는 방금 딱 하고 내딛은 지팡이에 의지해서 천천히 한 발을 내딛었습니다. 이어 다른 한 발을 끄는 듯이 해서 힘겹게 걸음을 놓았습니다. 할아버지는 한 쪽 다리가 조금 불편합니다.
동네 울타리길 걷기운동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매미소리가 요란하던 어느 날 내가 백합나무 그늘 밑 긴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저만치서 딱딱 지팡이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오던 할아버지가 내 옆에 와서 앉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한 쪽 운동화의 끈이 풀어져 있었습니다. 걸음을 놓을 적마다 나풀거려 신경이 쓰였을 것입니다. '운동화 끈이 풀어지셨네요' '네' 그러나 할아버지는 운동화 끈을 다시 맬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운동화 끈을 매려면 허리를 굽혀야 하는데 허리를 푹 굽히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말없이 운동화 끈을 단단히 아주 단단히 매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두 번째 만났습니다.
마침내 할아버지와 나란히 걸어갑니다. 딱 딱 소리와 함께 느릿느릿 할아버지의 걸음을 따라서 갑니다. 할 말도 없고 해서 그냥 물어보았습니다.
"봉숭아꽃을 좋아하시나 봐요""봉숭아꽃을 보면 마누라가 생각나요. 봉숭아꽃물 들이길 좋아했거든요. 그 옛날에 등잔불 밑에서 내가 들여 주곤 했지요. 까마중이파리, 싱아풀, 백반, 하얀 무명실, 뭐 그런 거 알아요?" "네 알아요. 저도 어릴 적에 어머니가 그런 걸 준비해서 봉숭아꽃물을 들여 주셨지요. 까마중 이파리가 없으면 피마자 이파리로 했어요" 할아버지는 내가 공감하자 기분이 좋으셨던지 눈꺼풀이 늘어져 작아진 눈을 반짝이며 웃음을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팔십 후반으로 보입니다. 얼굴에도 손등에도 검버섯이 많습니다. 늙으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서 웃고 떠들 수 있는 친구를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부인이 살았다면 더 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식들이나 젊은 이들은 거의가 이 바쁜 세상에 웬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를 하느냐고 면박을 주거나 달아나버립니다.
"봉숭아꽃나무에 곰팡이가 피면 기세를 떨던 매미소리도 한풀이 꺾이지요. 해도 짧아지구요.""그러고 보니 새벽 다섯 시면 창문이 훤했었는데 요즘은 여섯 시가 거의 되서야 훤해져요. 근데 걷기운동 많이 하셨어요?" "오늘은 조금 걸었어요. 힘들어서요. 그래서 중간에 이 길로 들어왔어요. 조기 은행 앞에 가서 좀 앉았다가 가려고요. 근데 봉숭아꽃밭을 보게 됐지 뭐예요" 우리 동 앞길을 지나자, 길 건너에 은행이 보입니다. 은행건물 앞에는 작은 마당이 있습니다. 마당을 둘러간 무릎 높이에 벽돌담이 의자 구실을 합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앉아서 수다를 떨기도 하는 장소입니다. 내 걸음으로 1분도 안 걸리는 길을 5분도 더 걸려서 은행 앞에 온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놓고 벽돌담에 앉더니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습니다. 짧은 길을 걸었지만,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눈빛은 여전히 즐거워 보입니다. 나는 내 갈 길을 가야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왜 옆에 앉지 않느냐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물었습니다.
"바빠요?" "네. 성당에 주보 접으러 가던 길입니다. 열 시까지 가야해요. 토요일마다 접어요"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중얼거렸습니다.
"벌써 열 시가 다 되었네..." 문득 할아버지가 외로워보입니다. 내가 옆으로 앉으면 할아버지의 가슴 속 이야기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듯만 합니다. 언제부터 다리가 불편하셨을까. 어느 동에 사시는 걸까. 그러나 나는 묻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운동화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운동화 끈이 단정하게 잘 매어져 있습니다.
이만큼 오다가 돌아보았습니다. 그새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딱 하고 내딛은 지팡이에 의지해서 한 쪽 발을 내딛고 이어 또 한 발을 끄는 듯이 해서 걸음을 놓습니다. 아까보다는 그 모습이 한결 가벼워 보입니다. 초라한 봉숭아꽃밭에서나마 봉숭아꽃물 들이기를 좋아했던 부인을 추억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 또 만나면 할아버지 가슴 속에 이야기들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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