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2월 21일 오전 개관한 서울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다. '5.16쿠데타'를 '5.16혁명'으로 미화한 전시장에 내걸린 사진을 향해 한 관람객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박근혜 의원은 "5·16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말을 그 뒤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해왔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도 박근혜 후보는 "5·16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견해를 일관되게 밝혔다.
올 7월 16일 새누리당 경선 때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에서도 표현은 조금 달랐으나 5·16에 대한 평가에는 변함이 없었다. "5·16은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8월 8일 청주에서 열린 새누리당 대선주자 TV 토론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5·16을 옹호했다. 비박(非朴) 주자들이 박근혜 후보의 역사관을 비판하자 "과거에 사시네요"라며 비꼬았다. 그리고 5·16 쿠데타가 헌법 질서를 유린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나라 전체가 공산화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없어질 수 있어서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5·16은 쿠데타가 "아니다"라고까지 했다. 그러면서 "역사적 평가에 맡겨야 한다"는 기존 생각을 고수했다.
9월 10일, 박근혜 의원은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5·16 쿠데타, 유신체제,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다시 밝혔다.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 평가에 대해서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유신에 대해서도 "당시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까지 하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고 말함으로써, 유신까지도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완강한 자세를 보였다.
5·16과 유신에 대한 그의 일관된 완강한 태도는 딸로서 아버지 박정희를 절대 추종하면서 생긴 확신, 이로 인한 폐쇄적 독선, 거기에 우리 사회 수구기득권 세력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은 오만, 여기에 역사와 사건 내용에 대한 무지까지 모두 겹쳐진 것으로 보인다.
인혁당 사건에서 보인 치명적 무지와 독선이렇게 완강한 태도를 보인 그는 인혁당 사건에서 치명적인 무지와 독선을 보였다. 최근 방송 출연 등에서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 대표적인 사법살인인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나.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에도 여러 증언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발언에서 사건 자체뿐 아니라 사법체제에 대한 무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인혁당 사건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 있고, 민청학련 배후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몰아세운 '2차 인혁당 사건'이 있다. 박근혜 의원이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에도 여러 증언을 하고 있다"고 한 말은 바로 '인혁당 1차 사건'을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군부독재 최악의 사건으로 꼽히는 사건은 1차 사건이 아닌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1975년 4월 9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8명에 대해 대법원 확정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사건이다. 당시 국제법학자협회가 사형집행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할 만큼 국제사회의 비판도 거셌다. 사형집행을 당한 8명은 혹독한 고문으로 신체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으며, 그래서 사형집행 뒤 유족에게 시신이 바로 전달되지 않고 화장처리된 뒤 전해졌다.
유신 치하의 꼭두각시 사법부가 사형판결을 내렸던 인혁당 사건에 대해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는 유신정권 때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한마디로 가치 없는 모함"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의 인혁당 조작 발표가 있은 뒤 2005년 12월, 법원은 이 사건의 재심을 수용했고, 2007년 1월 서울지방법원은 이미 형이 집행된 피고인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박근혜 의원은 1975년 유신 때의 꼭두각시 법원에 의한 사형 판결과, 그것이 잘못되어 '무죄' 판결을 내린 2007년의 판결을 별개로 보고 있다. 앞의 판결이 잘못된 것이어서, 뒤의 재심에서 그것을 바로 잡았는데도, 별개의 판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법에 대한 무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게다가 그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말로 2007년의 무죄 판결을 수용할 수 없다는 완강한 독선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박근혜의 근원적 한계, 아버지 박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