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를 다녀와서 Ⅱ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님의 삶과 투쟁

등록 2012.09.20 14:40수정 2012.09.2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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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7월 23일)

이상룡 선생님이 순국하신 마을 서과촌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내신 이상룡 선생님이 노후를 보내신 서과촌의 표지석. 이곳을 찾기 쉽지 않아서 다른 곳을 갔다가 이 표지판을 보고 가다.
이상룡 선생님이 순국하신 마을 서과촌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내신 이상룡 선생님이 노후를 보내신 서과촌의 표지석. 이곳을 찾기 쉽지 않아서 다른 곳을 갔다가 이 표지판을 보고 가다. 신 민 구
오늘은 먼 거리를 이동하여야 하기에 5시에 기상했다. 8시 흐린 날씨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작렬하는 만주의 햇빛을 맞이해야만 했다. 대부분 단원들은 장춘 지역 서란현의 서과촌으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내신 이상룡의 선생님 서거지역을 답사했다.

그러나 광대한 지역에서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아 택시(16대)를 탔지만 길을 잘못 들어서 다시 이동해야했다. 그마저도 대형버스가 전기줄에 걸려 소형버스 2대로 나눠 타고 서과촌을 찾았다.

도착하니 우리 어릴 때처럼 마을 아이들이 제일 먼저 신기한 눈으로 큰 구경거리인양 희희락락거리며 반기고 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서 우리를 맞이하였다.

우리나라 1960~1970년대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이상룡 선생님이 살았던 흔적은 없고 마을에서 당시 사용한 우물터도 없었다. 단지 추정된 지역에서 선생님에 대한 추모식을 간단히 하고 기념사진촬영하였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이상룡국무령의 손자이신 이항증 선생님이 친철하게 설명해주셨다.

이방인인 우리를 반기고 있는 이 마을의 아이들 서과촌 마을 아이들과 성인들이 어릴 적 우리 때와 비슷하게 호기심어린 
눈으로 이방인인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이방인인 우리를 반기고 있는 이 마을의 아이들서과촌 마을 아이들과 성인들이 어릴 적 우리 때와 비슷하게 호기심어린 눈으로 이방인인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신 민 구
우당 이회영 가문이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망명을 결행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예, 부귀영화도 버리고 모든 가산을 처분했다.

지금의 명동 YWCA 건물과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 일부가 이회영 일가가 살던 곳이다. 둘째 이석영의 재산 등을 포함해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650억원 (소 값으로 환산) 내지 2,000억원(땅값으로 환산)의 거금이었다.


또 이듬해인 1911년 2월, 이회영 가문에 뒤이어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유림과 지사들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과 그 가족들이 집단으로 망명했다. 망명에 앞서 모든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모두 정리한 석주 이상룡의 예에서 나타나듯 영남의 명문가들이 앞장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석주 이상룡 선생님이 서거한 1932년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이나 생활이 매우 어려운 때였다.석주는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고 관대하게 화합의 길을 걸었지만 독립운동의 기본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만은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단원들이 이상룡선생님이 순국하신 서과촌 마을에서 묵념하고 있는 모습 서과촌에서 이상룡선생님과 가족들이 매일 사용한 마을우물터에서 설명을 듣고 약식으로 묵념하고 있다.공식적인 행사는 할 수 없었다.
단원들이 이상룡선생님이 순국하신 서과촌 마을에서 묵념하고 있는 모습서과촌에서 이상룡선생님과 가족들이 매일 사용한 마을우물터에서 설명을 듣고 약식으로 묵념하고 있다.공식적인 행사는 할 수 없었다. 신 민 구
1931년에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해 관동군 손아귀에 넘어갔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독립운동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게릴라전과 같은 새로운 투쟁양식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할 때 동지인 이장녕과 폐교된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여 검성중학교를 세운 여준 선생님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석주는 곡기를 끊고 냉수만 들다가 향년 74세로 서거하다. 단원 중 5명은 여준선생님이 세운 검성중학교 옛터를 답사하러 갔다.

완전중학교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학교 측에서 방문을 하지말아 줄 것을 당부하여 가지 못하다. 현재 한중관계가 한일군사협정이 중국을 겨냥하고 있고 최근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나중에야 이야기했다.

일부 단원들이 검성중학교가 있었던 우물터에서 기념촬영을 하다. 여준선생님이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여 검성중학교를 세운 곳이다.
일부 단원들이 검성중학교가 있었던 우물터에서 기념촬영을 하다.여준선생님이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여 검성중학교를 세운 곳이다.신 민 구

조선족완전중학교는 1912년에 세워진 '은양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하현에는 26개의 조선족 중학교가 있었으나 계속되는 조선족 이주로 학생들이 줄어들어 3개 학교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2005년에 3개 학교가 통폐합하여 지금은 유일한 조선족중학교로 남게 되었다.

조선족중학교의 뿌리인 은양학교는1912년 10월 10일 서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류하현 삼원포 대화사에서 독립운동가 방기전 장로가 세웠다. 1920년 교장 방기전 장로가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학교는 불살라졌다. 1922년 독립운동가들이 은양학교 후신으로 '동명학교'를 새로 세웠으나 교장 한경희 목사가 한족 토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중국정부에 의해 폐교되었다.

서과촌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기념 촬영 서과촌에서 좌측으로 부터 임추섭선생님,이항증선생님,윤종순선생님,필자
서과촌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기념 촬영서과촌에서 좌측으로 부터 임추섭선생님,이항증선생님,윤종순선생님,필자신 민 구

1947년에 독립운동가 조선족들이 다시 동명소학교, 중학교를 열어 오늘의 조선족중학교가 끈질긴 역사와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금년이 개교 99년, 내년이 개교 100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다. 현재 교직원 81명, 초, 중, 직업고등학교 학생 700명이 공부하고 있는 유하현의 유일한 조선족중학교다.
#광주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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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에 몸담으면서 교사.교육활동은 현장단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에서도 변혁이 되어야만 참교육에 이른다고 봅니다.그래서 짧은 소견을 대중적인 전자공간을 담보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전달하고 합니다. 저서로 [자본론노트],[청소년을위한백두선생경제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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