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인 우리를 반기고 있는 이 마을의 아이들서과촌 마을 아이들과 성인들이 어릴 적 우리 때와 비슷하게 호기심어린
눈으로 이방인인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신 민 구
우당 이회영 가문이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망명을 결행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예, 부귀영화도 버리고 모든 가산을 처분했다.
지금의 명동 YWCA 건물과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 일부가 이회영 일가가 살던 곳이다. 둘째 이석영의 재산 등을 포함해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650억원 (소 값으로 환산) 내지 2,000억원(땅값으로 환산)의 거금이었다.
또 이듬해인 1911년 2월, 이회영 가문에 뒤이어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유림과 지사들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과 그 가족들이 집단으로 망명했다. 망명에 앞서 모든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모두 정리한 석주 이상룡의 예에서 나타나듯 영남의 명문가들이 앞장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석주 이상룡 선생님이 서거한 1932년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이나 생활이 매우 어려운 때였다.석주는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고 관대하게 화합의 길을 걸었지만 독립운동의 기본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만은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