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과 회천을 경계로 신라와 대립했던 대가야는 사다함을 선봉장으로 한 신라의 공격에 무너진다. 사진은 대가야 땅 개경포가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의 풍경이다.
정만진
진흥왕 이후 신라는 백제보다 강국이 된다. 성왕을 전사시키고, 대가야를 무너뜨린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진흥왕은 재위 15년(554), 관산성을 공격해온 백제 성왕을 전사시켰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잃었다.
삼국사기는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당시 백제의 좌평(지금의 장관)은 모두 8명이었으니 그 중 4명이 한 전쟁터에서 한꺼번에 죽었다는 것은 그만큼 관산성 일대 싸움에서 백제가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싸움의 지휘관은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이었다. 23년(562)에는 이사부를 시켜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선봉장은 사다함이었다. 왕은 1등공신 사다함에게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다.
세 번이나 상을 사양하던 사다함은 밭은 군사들에게 나눠주고 포로들은 풀어 주어 양민이 되게 했다. 37년(576), 처음으로 원화(源花) 제도를 두었다. 원화는 화랑의 초기 형태로 두 명의 여성 지도자가 무리를 이끌었다. 그 해 8월, 진흥왕이 죽었다.
진흥왕릉, 기대보다 훨씬 작고 초라해진흥왕릉 근처에 있는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의 무덤들도 허술하기는 진흥왕릉과 다를 바 없다. 표석만 없으면 도저히 왕릉으로 여겨지지 않을 그런 규모다. 네 왕릉 모두 둘레가 45∼60m 정도밖에 안 된다. 무열왕릉이 100m, 그 뒤편의 서악 고분군 4기가 각각 100∼186m 둘레의 무덤인 것에 견주면 실제 규모는 1/4에 불과하다.
진지왕과 헌안왕은 불과 3∼4년 왕위에 있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문성왕은 18년간 재위했지만 장보고의 반란을 제압하고 청해진을 없앤 것 외에는 뚜렷하게 한 일이 없다. 그나마 청해진을 없앤 일은 그 이후 우리 역사에서 해양 진출의 기세가 수그러든 것을 볼 때 잘한 일이라고 평가할 수도 없다. 그래서 무덤들이 이토록 작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