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봉대청대피소와 중청대피소는 사라지고, 지금은 중청 안부에 설악산장이 자리하고 있다.
정덕수
지금이야 통나무로 지은 설악산장이 예전 중청대피소 앞에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시점인 1981년에는 시멘트로 돌을 쌓아 지은 대피소가 하나 있었고, 그 뒤로도 샘터가 하나 있었다. 대피소 아래로도 20분가량 걸어 내려가면 샘이 있었고...
대피소에서 잔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식사를 하거나 그대로 대청봉 등으로 각기 목적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할 때서야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끝청봉에서 오색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고, 좀 더 한계령 방향으로 내려가다 독주골로 하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계령으로 하산하기로 마음 정한 터라 천천히 걷다 한계령 샘터쯤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도 상관없다.
느릿느릿 짐을 챙겨 배낭을 꾸리고 나니 시간은 오전 9시를 넘었다. 지난밤 술을 마셨는지 소란을 피우던 옆 텐트는 아직도 잠에 빠진 모양이다.
중청대피소를 지나 곧장 왼쪽으로 들어서면 끝청봉을 거쳐 서북주릉이 시작된다. 아주 잠시 오색마을이 보이는가 싶었으나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내일이면 그곳으로 가니 지금 애써 보려 할 일도 없다. 비스듬히 누운 길가엔 짙은 담갈색으로 물든 진달래가 단풍철이 시작되었음을 일러주려는 모양이다.
중청을 막 벗어나면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 굽어보이는 끝청으로 난 암릉길이다. 아무리 배낭이 무거워도 한 번만 쉬면 끝청까지 단숨에 갈 수 있지만, 서두를 일이 없는 산행이라 전망 좋은 곳이면 배낭을 기대놓고 한참씩 앉아 여유를 부려본다.
칠부바지에 긴 타이즈 양말을 덧신고 앞에 주머니가 달린 등산용 바람막이를 걸친 이들이 무시로 눈에 들어온다. 군화와 농구화를 신고 한껏 멋을 부린 이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간혹 귀하게 구할 수 있는 이탈리아산 가죽 등산화를 신은 이들과 을지로 송림에서 제작한 등산화를 신은 이들도 눈에 띈다. 왁스를 발라 광을 낸 등산화를 신은 이들은 당일치기로 왔거나 지난밤 잠들기 전 왁싱(Wattage)을 했겠다.
지난해 소백산에 갔을 때 한 선배의 손에 이끌려 맞춤 등산화를 처음 얻어 신었다. 내 스스로 이런 등산화를 구입할 엄두도 못 낼 일인데 몇 번 동행하다보니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모습을 보시곤 큰 맘 먹고 하나 선물하셨겠다.
이젠 바닥 고무가 다 닳아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걷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다. 밑창은 언제든 수선이 가능하다니 조만간 들러서 창을 손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