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삭스를 '임상경제학자' , 응급실 금융닥터라고 소개한 글이 흥미롭다.
박기용
개인은 사회에 대한 어떤 책임감도 가질 필요 없으며, 정부의 역할은 법과 질서를 지키고 개인재산을 보호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시장의 자유와 자발적 사적 계약에 의해 사회가 지배돼야 한다는 극단적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삭스는 '거대한 환상'이라고 일축한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시장의 효율성은 사회적 공평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공정성을 진작함으로써 경제적 효율성도 동시에 높아진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예컨대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인 하이예크나 프리드먼도 자연환경을 보호하기위한 시민적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더 나아가 자본의 힘에 휘둘리는 민주주의와 경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일반 대중들이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저자는 경제에 대한 미국정부의 리더십이 정점에 도달했던 시기를 60년대 중반이라고 회상한다. 케네디가 암살되고 그 뒤를 이어 집권한 린든 존슨 시대에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회적 법안들이 마련됐다. 1965년 한 해만 해도 투표권, 초중고등 교육, 수질 관리, 대학교육, 고형폐기물 처리, 자동차에 의한 대기가스 오염방지, 담배광고 규제와 관련한 법안들이 대규모로 의회에서 통과됐다.
저자가 미국경제와 사회전반에 걸쳐 강한 비판을 쏟아내면서도 비관주의에 함몰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과거 미국의 영화이다. 망가진 현실을 일으켜 세울 역사적 모델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과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다. 미래로 나아가는 동력이 될 과거의 모범이 부재한 한국. 경제의 활력과 양극화 해소라는 십자가를 양쪽 어깨에 둘러맨 한국사회는 문제해결을 위한 보다 큰 정치사회적 '집중'이 필요하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제프리 삭스는 미국 정당시스템의 취약성을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지난 번 미 대선 국면에서 세 차례 열린 티비 토론에서 '빈곤', '가난하다'라는 말이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면서, 미국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고 한탄한다. 미국의 민주, 공화 양당 모두 중도우파라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정치시스템은 진정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며, 두 개의 강력한 정당이 오랜 세월 안정적으로 지배하는 양자독점(duopoly)이라고 규정한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대선국면에 접어든 한국사회도 비슷한 고민이 아닐까? 형식상 여야로 나뉘어있고 어떤 정당과 후보를 선택해야 하나 고민하지만 결국 '한 주인이 낸 두 가게'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
비례대표시스템을 채택한 유럽에서는 중도좌파 정당에 의해 또는 모든 정당에서 일정 정도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는 기능이 존재하지만 , 지역구에서 단 한 명을 뽑는 미국의 선거시스템은 지역구의 주요 산업과 부유한 유권자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는 사회적 약자 배제한 중도우파 양당의 독점 저자는 책 곳곳에서 가진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또한 동시에 이른바 중산층, 일반 대중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사람들이 미디어가 부추긴 과도한 소비주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추구, 이기적 욕망에 함몰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자기 비하적 열등감으로 전화될 위험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빠져나와 측은지심과 상호부조, 집단적 의사결정을 이루는 사회를 만들자고 저자는 촉구하고 있다. 분배정의와 연대감, 상호존중의 핵심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우선 대중의 각성이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충분히 공감할 만한 현대문명진단이 아닐 수 없다.
다시 구체적 경제지표를 통해 현 경제상황을 진단해보자. 미국의 재정적자는 3년 뒤인 2015년에 GDP의 75%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전시가 아닌 평시의 재정적자규모로는 유례가 없는 일인데, 저자는 이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예산삭감과 증세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금을 올린다는 것은 누구나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산삭감만으로 재정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에 솔깃해지지만, 저자는 예산사용상의 막대한 낭비가 있기 때문에 이를 줄이면 된다는 개념은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현재 미국의 상위 1%는 미국 전체 가계소득의 21%, GDP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과거에 비해 부의 독점현상이 심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 고소득층의 소득세율은 지난 70년 47%에서 현재 31%로 낮아졌다. 소득은 커졌는데 세금은 오히려 줄어든 셈이다.저자는 고소득층에 대한 소득세율을 올리고 부유세를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법인세도 대폭 손질을 해야한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법인세 감면조항이 많고 '텍스 헤이븐' 조세회피국가로 기업이익을 이전하는 사례가 증가하는 등 법인세 체계에 허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지난 60년 법인세 징수실적이 GDP의 3.5%였으나 지금은 1.5% 수준이다.
한국기업도 실효법인세율이 전 세계 최하위권이다. 명목세율은 22%이지만 기업의 실제부담은 18%수준이다. 이는 중국, 홍콩, 싱가포르보다 낮고 일본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한국도 경제활성화와 양극화 해소를 위해 고소득층과 기업에 대한 소득세, 법인세 세율인상이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
예산삭감만으로는 국가재정문제 해결 못해... 고소득층 증세 불가피제프리 삭스는 가진자들, 대기업의 끝없는 탐욕과 이들에 대한 편들기로 일관하는 정부를 질책하면서, 섬뜩하게도 세 개의 숫자를 나열한다.
1914, 1917,19331914년은 1차 세계대전, 1917년은 러시아의 시월혁명, 그리고 1933년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을 말한다.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낡고 가혹한 현재의 경제시스템을 전면 재정비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우리 앞에 기다릴지 알 수 없다는 저자의 묵시록적 경고에 다름 아니다.
끝으로 제프리 삭스는 미국사회 가진자들의 절제되지 않는 이기심을 설득력있는 지표로 개탄한다. 미국의 보수적우파들은 입만 열면 저소득층의 근로의욕 부족, 과도한 복지예산을 거론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부지출은 그야말로 코끼리 비스켓이다.
예를 들어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세 환급액은 전체 GDP 의 0.3 % 에 불과하며 일시적 긴급구호예산 또한 GDP 의 0.2 % 라는 것이다. 복지예산의 대부분은 백인중산층, 심지어 티파티도 지지하는 메디케어 - 노인층을 위한 의료복지 - 와 퇴직연금 (social security)이다. 정말로 가난한 자에게 지급되는 복지예산의 비중이 아주 미미한 수준에 불과한데 마치 이것이 경제에 주름살을 주는 것처럼 억지를 편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따라서 저자는 과학적 근거없이 예산삭감만을 주장하지 말고 가진자와 기업에 대한 세금을 올림으로써 재정불균형을 해소하라고 주문한다. 단순한 선전선동이 아니라 꼼꼼한 데이터 분석에 의해 건져올린 제안이라는 점에서 제프리삭스의 정치경제학은 시대의 진전을 가로막는 낡은 세력들의 허구를 깨고 나가는 도구로 유용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양극화를 해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데 필요한 논리적 나침반을 장착하기를 기대한다.
문명의 대가 - 위기의 미국이 택해야 할 경제와 윤리
제프리 삭스 지음, 김현구 옮김,
21세기북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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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들의 불평등 구조 깨고 '시민'으로 거듭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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