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오지마, 아빠 오면 집에 가야 하잖아"

[초보 아빠의 좌충우돌 육아일기 23] 까꿍이와 산들이의 최고 선물은 산청 외가

등록 2012.11.23 17:39수정 2012.11.2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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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외가에 간 아이들


a  외갓집 마당에서

외갓집 마당에서 ⓒ 정가람


한 달 전, 아내와 아이들이 2주 동안 산청 처가에 머물렀었다. 내년 2월 출산 예정인 셋째 때문에 거동이 점점 불편해지는 만큼, 아내는 조금 더 추워지기 전에 친정에서 며칠 동안만이라도 엄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고 싶다고 했고, 난 그런 아내의 바람에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오랜만에 딸자식과 손주를 봐서 좋고, 아내는 오랜만에 부모님 보고 집안 살림 안 하니까 좋고, 난 오랜만에 아내 눈치 보지 않고 친구들과 술 약속 잡으니까 좋고. 그야말로 일석 삼조 아니겠는가.

추석 다음 주, 처자식을 처가에 남겨두고 홀로 서울로 올라온 나의 일상은 평소와 180도 달라졌다. 평소 같았으면 웬만하면 임신한 상태에서 아이 둘을 보고 있는 아내를 돕기 위해 퇴근 후 곧장 집으로 향했을 텐데, 2주 동안은 집에서 혼자 저녁밥을 해먹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술 약속을 만들어 끼니를 해결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던 친구들.

그러나 화려할 것 같았던 유부남의 외기러기 생활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전과 달리 식구들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퇴근해서 아파트 문을 열 때 제대로 되지 않는 발음으로 "아빠!"를 외치며 반갑게 뛰어오는 둘째와 소파에 앉으면 책 읽어달라고 엉덩이부터 들이미는 첫째가 눈에 선했고, 잠자리에 누우면 아무 말 없이 힘이 되어주던 아내의 체온이 그리웠다. 한꺼번에 세 식구가 자리를 비우고 나니 뭔가 허전한 이 기분.

a  물장난, 흙장난 만으로 하루는 간다

물장난, 흙장난 만으로 하루는 간다 ⓒ 정가람


a  따땃한 산청의 볕

따땃한 산청의 볕 ⓒ 정가람

그렇다고 아내에게 당장 올라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임신한 아내가 아이 둘씩이나 데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을 뿐더러, 매일 틈틈이 아내에게서 오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더 외가 생활을 하게 놔두는 것이 옳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산청이라는 천혜의 자연 속에서 뛰어노는 첫째와 둘째의 환한 얼굴. 역시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커야 한다.

매일 저녁 아내에게 전화하면 까꿍이는 항상 일과를 내게 설명하느라 바빴다. 오늘은 외할머니와 함께 고구마와 땅콩을 캤고, 개미를 땅속에서 발견했으며, 할아버지와 함께 토끼와 소에게 밥을 줬다는 녀석. 그래, 자연관찰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는 이렇게 자연에서 직접 관찰하고 뛰어노는 게 네게 훨씬 좋은 영향을 미치겠거니.


까꿍이는 이제 그만 서울 집으로 오자는 나의 빈말에도 펄쩍 뛰며 싫다고 했다. 비록 친구들은 없지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마당에 나가 뛰어노는 게 훨씬 재미있다고 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녀석들은 집에서 가지고 간 장난감들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데,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나도 그랬지만 그때는 집 밖에서 흙장난만 해도 하루가 다 가는 그런 시절 아니던가. 어쩌면 그 나이 또래의 장난감이란 도시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제대로 뛰어놀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고안된 대체재인지도 모른다.

a  집에 돌아가기 싫은 까꿍이

집에 돌아가기 싫은 까꿍이 ⓒ 정가람


a  고구마 캐기와 개미 잡기

고구마 캐기와 개미 잡기 ⓒ 정가람


특히 외가 생활은 첫째보다 둘째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까꿍이의 경우는 그래도 이제 뭘 좀 안다고 그 와중에 EBS 만화도 챙겨보고 했지만, 둘째는 눈 뜨자마자 무조건 밖으로 나가자고 칭얼댄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핀 꽃들에게 인사하고, 동물들을 보면 무서워서 차마 다가가지는 못해도 한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지켜보는 산들이. 아내는 녀석이 누나 까꿍이보다 자연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한숨부터 나왔다. 과연 그런 녀석은 회색 도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산들이는 창밖으로 펼쳐진 아파트 숲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좁은 집안에서 부모 편하자고 뽀로로 TV를 틀어주는 우리의 행태가 녀석의 성장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나의 외가, 영주

산청 외가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자식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건 경북 영주에 있었던 나의 외가였다.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부모님 결혼 전에 돌아가신 탓에 외가는 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시골이었는데, 어머니는 30여 년 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여동생과 나를 데리고 외가에 가셨었다.

지금이야 중앙고속도로가 뚫린 탓에 서울에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 되었지만,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경북 영주는 결코 쉽게 갈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면 3~4시간이 지나야만 도착하는 영주. 어머니는 동생과 내가 지겹다고 몸을 뒤틀기 시작하면 소백산맥을 넘어 곧 풍기에 도착하게 된다며 위로하곤 하셨는데, 어렸을 때는 그 '풍기'란 단어가 왜 그리 웃겼는지.

a  30년 전 영주시 서천에서

30년 전 영주시 서천에서 ⓒ 이희동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외가 영주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비록 사회과부도에서는 영주가 중앙선과 태백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라 가르쳤지만, 그곳은 내가 서울에서 접하던 도심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회색빌딩 대신 푸른 들과 산이 펼쳐져 있고, 사람들이 한가로이 거닐며 유유자적 살던 곳. 영주는 행정구역 상 '시'였지만 어린 눈으로 보기에는 분명 시골이었다.

특히 영주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내 중앙을 관통하는 큰 시냇물, 서천이었다. 나는 외가에 갈 때마다 사촌들과 함께 외삼촌, 이모의 손을 붙잡고 냇가로 놀러 나갔는데, 어린 눈으로도 그곳의 풍경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날씨가 더워지면 자연스럽게 냇물에 뛰어들어 멱을 감는 사람들. 평소 서울에서 한강만 보며 살아오던 내게 그 광경은 낯 선만큼 충격이었다. 도시를 흐르는 냇물이 이렇게 깨끗할 수 있다니. 아직도 난 냇가 모래사장에 앉아 노는데 우연히 내 손아귀로 들어온 새끼 물고기의 그 낯선 느낌을 기억한다.

a  장난감이 필요없는 바구니쓰기와 기차놀이

장난감이 필요없는 바구니쓰기와 기차놀이 ⓒ 정가람


a  그들은 땅콩 선별 중

그들은 땅콩 선별 중 ⓒ 정가람


그러나 이런 나의 영주 외가는 가평 큰 외삼촌께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게 된 이후 사라졌다. 물론 머리가 굵고 나서는 소백산과 부석사 등을 가기 위해 가끔 들렀던 영주였지만 어렸을 때처럼 냇가에서 놀 기회는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유년 시절에 보았던 그 아름다웠던 풍경과 함께 항상 동경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영주. 나의 외가는 도시에서 태어나 삭막한 환경만 보아오던 내게 하나의 판타지였다.

어린 시절 외가에 대한 그리움. 그것은 결국 내가 아이들을 산청 처가에서 쉽게 데려오지 못하는 이유였다. 내가 어렸을 때 외가에서 느꼈던 그 푸근함을 녀석들에게도 선사하고 싶었다. 까꿍이와 산들이도 지금 이 기억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가겠지. 어쩌면 이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까꿍아, 산들아 산청에서 조금 더 신나게 뛰어놀렴. 혹자들은 아직도 너희들을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아도 되느냐고 걱정하지만, 너희 나이 때는 산과 들을 누비면서 뛰어놀아야 한다는 것이 엄마와 아빠의 바람이란다. 다행히 너희는 산청이라는 매우 아름다운 외가가 있잖니.

a  그 나이에 토끼 귀잡아 올리는 아이는 까꿍이 밖에 없을 듯

그 나이에 토끼 귀잡아 올리는 아이는 까꿍이 밖에 없을 듯 ⓒ 정가람


a  석류 따먹기

석류 따먹기 ⓒ 정가람


덧붙이는 글 p.s : 그나저나 내가 어렸을 때 그토록 좋아했던 영주의 서천과 합쳐지는 내성천이 4대강 사업의 일환인 영주댐 건립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빠졌다고 한다. 비록 영주 시내를 가로지르는 서천에는 직접적인 타격이 없겠지만, 서천만큼이나 아름다운 모래사장을 자랑하는 내성천 역시 누군가의 고향이자 외가의 일부일 터, 영주댐 건립이 맹목적인 개발 패러다임에서 파생된 어리석은 토목공사는 아닌지 다시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최소한 현 정부 아래에서 진행되는 댐이나 보 공사의 타당성은 그대로 믿을 수 없지 않은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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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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