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났습니다큰 형님이 좋아하셨습니다.
김관숙
주보 접기가 끝나고 잡담을 하면서 간식을 먹을 때입니다. 제일 큰 형님(1919년생)이 나를 건너다보면서 어려운 말을 꺼낼 때처럼 조용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집에서 촛불 기도할 때 말야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이려니까 불편하더라구."그 옆에 형님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나도 그래. 라이터 불이 위로 솟으니까 초 심지에 닿지를 않아. 초를 기울여서 라이터 불에 대야한다구." 큰 형님이 다시 말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막내가 성냥 어디서 파는지 좀 알아봐줘. 그 많던 성냥을 다 썼지 뭐야." "형님, 요즘 성냥이 어딨어요? 성냥 사라진 지가 언젠데…."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야." 참 난감합니다. 하지만 제일 큰 형님의 부탁이라 '알아 볼게요'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큰 형님은 기도를 많이 하는 분입니다. 주일 미사도 거른 적이 없고 수요일에 있는 실버노래교실도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94세인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건강하시기도 하지만 친구들도 많습니다.
친구 누구와 무슨 대화를 해도 세상물정에 밝아 막힘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마도 신문은 물론 종합편성채널까지 두루두루 보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런 분이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성냥을 어디서 파는 지 알아봐 달라고 할 때는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이기가 어지간히도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G마켓에 들어가 보니까 놀라울 정도로 성냥이 아주 많습니다. 내가 젊은 시절에 석유풍로를 사용할 때 쓰던 성냥들이 그 모양 그대로 줄줄이 나타났습니다. 반갑고도 신기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이름 있는 성냥들이 기가 막히게도 모두들 무탈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사각모양인 성광성냥, 한복을 입은 여인이 장구를 메고 치는 그림에 아리랑성냥, 유엔팔각성냥 기린표 비사표 향로….
문득 성냥불을 켤 때 풍기는 유황 냄새가 맡아졌습니다. 나는 어릴 때 유황 냄새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고 통성냥을 들고 아궁이 앞에 앉기만 하면 얼른 어머니 옆에 가서 붙어 앉았습니다. 어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나서 통성냥을 높은 선반 위에 얹어 두었습니다. 성냥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도 군불을 땔 수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내가 결혼을 한 후에도 성냥은 소중했습니다. 석유풍로에 불을 붙일 때도, 형편이 조금 나아져서 가스레인지를 사용하게 되었을 때도 성냥불로 불을 붙였습니다.
지금은 가스레인지를 켜면 자동으로 불이 파랗게 일어나지만 1970년대만 해도 성냥불로 불을 붙였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보다 석유풍로나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일 때가 더 조심스러웠습니다. 성냥불을 대자마자 불길이 '확' 하고 소리를 내면서 순식간에 퍼졌던 것입니다. 나도 그 옛날에 어머니처럼 불을 붙이고 나면 성냥통을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선반에 두고는 하였습니다.
나도 큰 형님처럼 촛불 기도를 좋아합니다. 어머니가 촛불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기도 하였지만 기도 책과 묵주를 들고 촛불 앞에 앉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분심이 들지를 않습니다. 큰 형님이 촛불 기도를 하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참, 내가 쓰는 성냥들을 나누어 드릴까?" 나는 아직도 십여 년 전에 모아둔 크고 작은 홍보용 성냥들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집이나 식당 다방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계산을 하고 나면 상호와 전화번호가 인쇄되어 있는 작은 성냥갑을 하나씩 주었습니다.
그 홍보용 성냥갑들을 세 개의 구두상자에 차곡차곡 모아 두었는데 내가 촛불기도를 꾸준히 하는 바람에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냥갑의 색은 제 빛을 잃었지만 성냥불은 아직도 유황 냄새를 풍기면서 잘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