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한가히 낚시를 즐기는 부자. 그 곁에서 애완견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최성규
마침내 해냈다. 총 시간 8:02:44, 거리는 66.5마일, 평균 시속은 8.27마일. 출발지와 목적지의 고도 차이는 3500ft. 그리 나쁘지 않은 주행이었다.
갑작스레 비가 닥친다. 근처 편의점으로 피신했다가 잠잠한 틈을 타서 교회로 갔다. 문은 굳게 잠겼고 담당 목사 연락처도 알지 못한다. 어찌할지 몰라 현관 앞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교회 앞에 차가 한 대 멈추더니 아저씨가 내렸다. 쓰레기를 바닥에 털썩 내려놓던 그는 나를 알아채고 말을 걸었다.
"자전거 라이더네. 여기서 잘 거야?""뭐, 어쩔 수 없죠.""5분만 기다려봐. 트레이시가 올 거야.""그게 누군데요?""어. 교회 신자."그가 떠나고 정확히 5분 후 밴 한 대가 도착했다. 상(想)이 좋다. 소녀 같은 생기발랄함에 건강미 넘치는 그녀. 사정을 전해 듣고 교회 목사님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 아쉽게도 오늘은 문을 열어줄 수 없다는 답변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낙심한 나를 보던 트레이시는 묵을 곳을 알아봐주겠다며 여기 저기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너 여권 좀 보자!""네? 네. 여기요."약간 떨떠름하게 대답을 하고 여권을 건넸다. '흠, 흠'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여권 페이지를 차례 차례 넘겼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을 한다. 자기 집으로 가자는 것. 트레이시 에드스트롬(Tracie Edstrom)은 마사지 테라피스트다. 집에 있다가 고객의 요청이 있으면 마사지 도구를 싸들고 집을 방문한다. 남편 데이빗(David Edstrom)은 부 보안관(deputy of sheriff)으로 일하는데 평화로운 마을이라 범죄 수사보다는 노인들 잔심부름, 길 찾아주기, 실종된 애완동물 수색 등의 일을 한다. 그들은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덕분에 직장과 가정 일을 동시에 하느라 무척 바빴다.
집 앞에 도착하자 자녀들이 모두 나와서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거대한 엘크(Elk)가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벽에 걸린 박제 동물의 상반신은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을 준다. 데이빗 아저씨가 직접 사냥해서 잡은 것이다. 일반 엘크는 300~350파운드 나가지만 이 녀석은 더욱 우람한 몸집을 자랑한다.
촛불이 환한 식탁에 가족과 손님이 모두 둘러앉았다. 교회 처마 밑에서라도 잘 각오를 하던 나에게 순식간에 천국이 다가왔다. 단란한 미국인 가족들. 한의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부부의 배려. 자전거 여행자에 대한 칭찬과 격려. 마음이 훈훈하다.
"이거 한 번 마셔봐. 저온살균하지 않은 우유야. 법적으로 살균처리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목장에서 직접 구입하기 때문에 생 우유를 마시지. 가공 공정으로 진짜 음식의 맛을 잃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저온살균법. 영어로는 pasteurization. 1860년대에 파스퇴르(Louis Pasteur)가 포도주의 부패방지를 위해 개발한 가열살균법이다. 우유, 맥주, 과즙 같이 가열에 의해 풍미를 잃기 쉬운 음식들에 적합한 살균 방식. 특히 우유는 열 저항성이 강한 결핵균의 사멸을 목적으로 한다. 보통 60∼80℃의 물 속에서 24시간마다 30∼60분씩 3∼7회 가열하여 살균하는 방법인데 세균은 60℃로 1∼2시간 가열하면 발육형인 것은 사멸하지만 포자(胞子)는 죽지 않는다. 하루 정도 상온에 방치해서 포자들이 발육형으로 변하면 다시 가열하여 사멸한다. 이를 몇 번 반복하면 세균이 모두 죽게 된다.
노란 빛깔의 우유다. 이제껏 흰색 우유에서 느끼지 못했던 고소함과 달콤함이 가득했다. 지친 여행자에게 안성맞춤의 음식이었다. 창문 너머로 록키 산맥이 보였다. 산신이 나를 바라보고 계신가?
7월 6일 금요일Fairplay, CO - McDonald flats campground, CO57 mile = 91.2 km어제 저녁의 일은 생각하면 할수록 오묘하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귀인을 만나다니… 그 집 막둥이 아들이 비워준 방에서 기지개를 폈다. 베란다 유리창 너머로 록키 산맥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빽빽한 침염수림이 산자락을 오밀조밀 감싼 가운데 봉우리 끝에 신령스럽게 구름이 감돈다. 가을 날씨처럼 상쾌하면서도 서늘한 공기가 살며시 집안으로 배어든다.
잠에서 깬 트레이시 아줌마는 진하게 우려낸 커피를 건넨다. 한 모금 마시고 록키 산맥 한 번 보고. 다시 한 모금에 경치 힐끗. 풍류를 아는 자린고비라. 나쁘지 않은데.
"저기 보이는 산이 1만4000피트로 북미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중 하나야. 우리는 폴티너(fourteener)라고 부르지."만년설과 구름에 휩싸인 봉우리 하나가 보였다. 많은 이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하는 명산을 트레이시는 동네 뒷산 오르듯 가끔씩 오른다.
브레켄리지(Breckenridge)에서 하키 연습 약속이 있는 아저씨가 나를 어제의 도착지점으로 데려다 주려 한다. 급하게 짐을 챙기고 그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진한 포옹을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낯선 여행자를 환대하는 미국인들에게 일종의 경외심이 들기도 한다. 나도 그렇게까지 해줄 수 있을까?
페어플레이(fairplay)에서 후지에 패스(hoosier pass)까지는 12마일. 고도는 1700여 피트 차이. 마지막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정상을 노린다. SR 9번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4마일 남겨두고 차들이 굼벵이 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 최고도를 자랑하는 도로라 영 속도가 나지 않는다. 갓길은 급격히 좁아지고 때마침 공사도 벌어진다. 차들이 빠르게 지나는 가운데 이중으로 고통을 겪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감과 육체의 괴로움.
갓길이 넓어지더니 넓은 개활지가 나오고 노란 조끼를 걸친 라이더 하나가 쉬고 있다. 동지를 만난 기쁨에 차선을 가로질러 그쪽으로 향한다. 제리 모리슨(Jerry Morrison). 고향인 일리노이 주 데카투르(decatur)에서부터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시작하여 시애틀에서 그 막을 내릴 계획이다. 우리는 함께 전열을 가다듬고 고지 정복을 향한 첫 페달을 밟았다.
1만1000ft를 넘어서면서 산소가 더욱 희박해졌다.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꼈다. 핸들을 더욱 꽉 쥐었다. 심장 소리가 요동치는 가운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표지석 하나가 서 있고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에서 가장 높은 지점. 1만1542ft(3518m)를 자랑하는 후지에(hoosier) 패스. 고된 만큼 보람도 커서 이제 여행을 다 마쳤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제리 아저씨와 함께 기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