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타고 도착한 '록키산맥', 감동이다

[시골한의사, 미국을 달리다] 미국 자전거 횡단 51일~53일

등록 2012.11.12 17:29수정 2012.11.2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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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 수요일

Lake pueblo state park, CO - Echo canyon campground, CO


52mile = 83.2km

어김없이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깬다. 동쪽 하늘에서 바알갛게 동이 터오고 푸에블로 호수가 햇살을 머금으며 황금색 물결을 반짝이기 시작한다. 자연을 벗 삼아 잠자리에 들었다 일어날 때면 자전거 여행이 주는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된다.

곳곳에 주차된 RV 차량에서 깊이 잠든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RV 파크 관리인도 아직 오지 않은 시각. 재빨리 짐을 정리해 자전거에 실었다. 야음을 틈타 관리소 건물을 잽싸게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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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 레이크 푸에블로에서의 아침 ⓒ 최성규


일반적으로 캠핑장을 이용하려면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아야 한다. 파크에 입장해서 맘에 드는 빈 공간을 찾는다. 캠핑카를 주차해 장소를 선점하고 관리소에 비치된 허가증을 작성한다. 본인의 이름, 주소, 차량 번호, 점유한 캠핑 사이트의 번호 등등. 허가증 뒤에는 봉투가 붙어 있다. 봉투를 떼어내 돈을 동봉하여 우편함에 집어넣는다. 허가증은 자신이 가지고 있다가 추후에 관리인에게 보여주면 된다.

내게 캠핑장을 안내해 준 아저씨는 오전 6시 반 전에는 관리인이 없다는 정보를 건네주었다. 천군만마 같은 정보를 들은 가난한 여행자는 슬그머니 캠핑장을 빠져나간다.


웨트모아(wetmore)를 향해 간다. 22마일 동안 1000피트 고도가 높아진다. 록키 산맥에 입성했음을 알리듯 기이한 지형들이 눈에 띈다. 길 양쪽으로 불쑥 솟아오른 둔덕이나 몇 천년 전에 강이 흘렀던 듯 구불구불 굽이치는 협곡들이 보인다.

삼거리가 나오면서 SR 96번은 왼쪽으로 꺾어지고 오른편으로 SR 67번이 이어진다. 바로 여기가 웨스턴 익스프레스(western express)와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trans america trail)의 갈림길이다. 웨스턴 익스프레스는 콜로라도, 유타, 네바다를 지나 캘리포니아로 간다. 건조하고 더운 기후가 라이더들을 기다리고 있다. 캔자스의 숨 막히는 더위를 다시 한번 생생하게 맛 볼 수 있다.


오른쪽으로 꺾어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타면 록키산맥이 도전을 기다린다. 최대 1만1000피트까지 오르내리는 난코스다. 어느 하나 만만치 않다.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다. 버몬트 커플과 스나이더(snyder) 가족이 무사히 여행을 마치길 바라며 나는 핸들을 오른편으로 틀었다.

플로렌스(florence) 표지판이 보인다. 자전거 여행의 종착지, 오리건 주 플로렌스와 같은 이름. 실제 목적지를 눈 앞에 두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담담할지, 시원할지, 아쉬울지 알 수는 없다. 오직 닥쳐봐야 알 뿐.

플로렌스의 한 빵집에 들러 아점(아침 겸 점심)을 먹는데 한 무리의 라이더들이 들이닥친다. 오! ACA 패키지 팀의 등장이다. 일정이 비슷하다보니 이렇게 마주치는 일이 잦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다 다시 캐년시티(canon city)에서 마주친다. 여자 매니저가 보인다. 패키지 팀을 인솔하는 이들은 남녀로 2명인데, 하루씩 번갈아가며 차량을 운행한다. 그 날 운전자가 아닌 사람은 참가자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게 된다. 보아하니 오늘은 폴 아저씨가 운전을 하는 모양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10마일 떨어진 캠핑 그라운드.

"캠핑장이 서너개 있던데 어디가 괜찮아요?"

"글세. 다 비슷할 텐데. 우리는 에코 캐년 캠프그라운드(Echo Canyon campground)에 묵을거라서."

ACA에서는 패키지 투어 한 달 전에 모든 숙박 예약을 했다. 마찬가지로 오늘 캠핑장에도 텐트장 두 곳과 통나무집 두 채를 임대해 놓은 상태다. 그녀는 뜸을 들이다가 내게 제안을 했다.

"사람에 비해 공간이 남거든. 우리랑 같이 있어도 돼."

천재일우의 기회. 놓칠 내가 아니다. 신나서 매니저 뒤를 쫄래쫄래 따라간다. 어느덧 Federal Route 50번으로 바뀌었다. 갓길은 있으되 교통량이 많은데다 속도가 만만치 않다. 주말 관광객이나 록키 산맥 동쪽에 위치한 대도시 인구가 이 근방으로 휴양을 오면서 차량이 급속하게 불어났다. 잘못하면 훅 간다. 천신만고 끝에 캠핑장에 도착하니 직원이 나와서 맞이해준다.

"ACA 패키지 팀이세요?"

"네. 그렇습니다."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고 나는 캠핑장으로 향했다. 여행을 하면서 느는 건 뻔뻔함과 거짓말. 오늘도 공짜로 묻어간다.

7월 5일 목요일

Echo Canyon Campground, CO - Fairplay, CO

66.5 mile = 106.4 km

자전거 패키지에는 일주일마다 하루씩 휴일이 있다. ACA 패키지 팀은 라이딩을 하지 않는다. 근처 알칸사스(alkansas) 강에서 래프팅을 즐길 예정이다. 나 홀로 출발 채비를 갖춘다. 어라, 참가자 중 한 명인 휴이(Huey) 아저씨가 자전거 복을 입은 채 걸어 나왔다. 콜로라도에 사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미리 하루 정도 시간을 벌어두려는 것이다.

오늘은 66.5 마일 떨어진 페어플레이(fairplay). 내일 31.5 마일 떨어진 프리스코(frisco)에서 차량을 렌트하여 120마일 떨어진 집으로 간다. 하룻밤 쉬고 다음날 복귀하면 ACA팀도 프리스코에 도착해 있다. 그렇게 해서 3일후부터 다시 일행과 함께 라이딩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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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에 홀리다. 하늘을 찌를듯 솟은 침엽수림과 파란 하늘 ⓒ 최성규


나는 두 종류의 계획을 세워보았다. 플랜 A는 46.5 마일 떨어진 하트셀(Hartsel). 플랜 B는 66.5 마일 떨어진 페어플레이(Fair play). SR 9번으로 들어서면서 시작된 오르막은 커런트 크리크 패스(currant creek pass ; 9404feet)까지 30마일인데 그 동안 고도가 3000피트 증가한다. 즉 10마일마다 1000피트다. 이 구간을 주파하는 시간을 보고 플랜 A와 플랜 B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늦게 출발한 휴이 아저씨가 나를 따라잡는다. 그가 사라지고 서서히 언덕이 나타났다. 걸어 올라가도 아찔할 경사길이다. 3.5, 3.0, 2.4. 속도계의 숫자는 계속 내려가고 허벅지 근육은 어느덧 한계에 이르렀다. 온 몸을 하얗게 불태우며 1시간이나 인내로 버틴다.

정직하게 10마일마다 한 번씩 쉬어준다. 원칙이기도 하려니와 그 이상 힘이 나지 않았다. 힘들고 적적하여 노래를 불러보았다. 순간 숨이 턱 막힌다. 고도가 9000피트가 넘다보니 호흡이 매우 가쁘다. 고산지대에서는 산소부족으로 두통, 호흡곤란, 불면증이 올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고지가 눈 앞이다. 아기를 갓 낳은 산모처럼 천천히 한숨을 몰아쉬었다. 싱겁게도 커런트 크리크 패스(CURRANT CREEK PASS)를 알리는 표식은 없다. 이제 하트셀(Hartsel)까지는 평탄하다. 2, 3마일 가량의 내리막이 펼쳐진다. 순간 속도가 40마일에 육박하고 브레이크가 파열될까봐 아찔하다.

하트셀(HARTSEL)은 심하게 낙후되어 있다. US 24번, SR 9번, CR 59번이 교차하는 지점이라 슈퍼마켓과 레스토랑 일부가 있을 뿐. 마을은 한산하고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집 안에 틀어박혀 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 물을 얻으려 한다.

"물 좀 채울 수 있나요?"
"여기는 제한급수를 하니까 물이 무척 귀해. 손님이 아니면 줄 수가 없어."

아주머니는 대신 얼음을 주마고 하였다. 세상에. 얼음보다 물이 귀한 동네가 있다니.

SR 9번 도로를 타고 북서쪽을 향하자 저 멀리 만년설로 뒤덮인 봉우리들이 보인다. 속도는 12마일. 높은 고도 덕분인지 적당히 덥고 남풍까지 산들산들 불어준다. 록키 산맥에서 평탄한 길을 밟는 기쁨은 남다르다. 가벼운 언덕을 몇 번 넘으니 1000피트 정도 고도가 더 높아졌다. 6마일 남겨두고 길은 오른편으로 굽이치며 흘러가고 그 시선 너머 마을 하나가 걸려있다. 페어플레이(Fair 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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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한가히 낚시를 즐기는 부자. 그 곁에서 애완견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 최성규


마침내 해냈다. 총 시간 8:02:44, 거리는 66.5마일, 평균 시속은 8.27마일. 출발지와 목적지의 고도 차이는 3500ft. 그리 나쁘지 않은 주행이었다.

갑작스레 비가 닥친다. 근처 편의점으로 피신했다가 잠잠한 틈을 타서 교회로 갔다. 문은 굳게 잠겼고 담당 목사 연락처도 알지 못한다. 어찌할지 몰라 현관 앞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교회 앞에 차가 한 대 멈추더니 아저씨가 내렸다. 쓰레기를 바닥에 털썩 내려놓던 그는 나를 알아채고 말을 걸었다.

"자전거 라이더네. 여기서 잘 거야?"
"뭐, 어쩔 수 없죠."
"5분만 기다려봐. 트레이시가 올 거야."
"그게 누군데요?"
"어. 교회 신자."

그가 떠나고 정확히 5분 후 밴 한 대가 도착했다. 상(想)이 좋다. 소녀 같은 생기발랄함에 건강미 넘치는 그녀. 사정을 전해 듣고 교회 목사님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 아쉽게도 오늘은 문을 열어줄 수 없다는 답변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낙심한 나를 보던 트레이시는 묵을 곳을 알아봐주겠다며 여기 저기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너 여권 좀 보자!"
"네? 네. 여기요."

약간 떨떠름하게 대답을 하고 여권을 건넸다. '흠, 흠'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여권 페이지를 차례 차례 넘겼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을 한다. 자기 집으로 가자는 것. 트레이시 에드스트롬(Tracie Edstrom)은 마사지 테라피스트다. 집에 있다가 고객의 요청이 있으면 마사지 도구를 싸들고 집을 방문한다. 남편 데이빗(David Edstrom)은 부 보안관(deputy of sheriff)으로 일하는데 평화로운 마을이라 범죄 수사보다는 노인들 잔심부름, 길 찾아주기, 실종된 애완동물 수색 등의 일을 한다. 그들은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덕분에 직장과 가정 일을 동시에 하느라 무척 바빴다.

집 앞에 도착하자 자녀들이 모두 나와서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거대한 엘크(Elk)가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벽에 걸린 박제 동물의 상반신은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을 준다. 데이빗 아저씨가 직접 사냥해서 잡은 것이다. 일반 엘크는 300~350파운드 나가지만 이 녀석은 더욱 우람한 몸집을 자랑한다.

촛불이 환한 식탁에 가족과 손님이 모두 둘러앉았다. 교회 처마 밑에서라도 잘 각오를 하던 나에게 순식간에 천국이 다가왔다. 단란한 미국인 가족들. 한의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부부의 배려. 자전거 여행자에 대한 칭찬과 격려. 마음이 훈훈하다.

"이거 한 번 마셔봐. 저온살균하지 않은 우유야. 법적으로 살균처리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목장에서 직접 구입하기 때문에 생 우유를 마시지. 가공 공정으로 진짜 음식의 맛을 잃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저온살균법. 영어로는 pasteurization. 1860년대에 파스퇴르(Louis Pasteur)가 포도주의 부패방지를 위해 개발한 가열살균법이다. 우유, 맥주, 과즙 같이 가열에 의해 풍미를 잃기 쉬운 음식들에 적합한 살균 방식. 특히 우유는 열 저항성이 강한 결핵균의 사멸을 목적으로 한다. 보통 60∼80℃의 물 속에서 24시간마다 30∼60분씩 3∼7회 가열하여 살균하는 방법인데 세균은 60℃로 1∼2시간 가열하면 발육형인 것은 사멸하지만 포자(胞子)는 죽지 않는다. 하루 정도 상온에 방치해서 포자들이 발육형으로 변하면 다시 가열하여 사멸한다. 이를 몇 번 반복하면 세균이 모두 죽게 된다.

노란 빛깔의 우유다. 이제껏 흰색 우유에서 느끼지 못했던 고소함과 달콤함이 가득했다. 지친 여행자에게 안성맞춤의 음식이었다. 창문 너머로 록키 산맥이 보였다. 산신이 나를 바라보고 계신가?

7월 6일 금요일

Fairplay, CO - McDonald flats campground, CO
57 mile = 91.2 km

어제 저녁의 일은 생각하면 할수록 오묘하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귀인을 만나다니… 그 집 막둥이 아들이 비워준 방에서 기지개를 폈다. 베란다 유리창 너머로 록키 산맥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빽빽한 침염수림이 산자락을 오밀조밀 감싼 가운데 봉우리 끝에 신령스럽게 구름이 감돈다. 가을 날씨처럼 상쾌하면서도 서늘한 공기가 살며시 집안으로 배어든다.

잠에서 깬 트레이시 아줌마는 진하게 우려낸 커피를 건넨다. 한 모금 마시고 록키 산맥 한 번 보고. 다시 한 모금에 경치 힐끗. 풍류를 아는 자린고비라. 나쁘지 않은데.

"저기 보이는 산이 1만4000피트로 북미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중 하나야. 우리는 폴티너(fourteener)라고 부르지."

만년설과 구름에 휩싸인 봉우리 하나가 보였다. 많은 이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하는 명산을 트레이시는 동네 뒷산 오르듯 가끔씩 오른다.

브레켄리지(Breckenridge)에서 하키 연습 약속이 있는 아저씨가 나를 어제의 도착지점으로 데려다 주려 한다. 급하게 짐을 챙기고 그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진한 포옹을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낯선 여행자를 환대하는 미국인들에게 일종의 경외심이 들기도 한다. 나도 그렇게까지 해줄 수 있을까?

페어플레이(fairplay)에서 후지에 패스(hoosier pass)까지는 12마일. 고도는 1700여 피트 차이. 마지막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정상을 노린다. SR 9번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4마일 남겨두고 차들이 굼벵이 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 최고도를 자랑하는 도로라 영 속도가 나지 않는다. 갓길은 급격히 좁아지고 때마침 공사도 벌어진다. 차들이 빠르게 지나는 가운데 이중으로 고통을 겪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감과 육체의 괴로움.

갓길이 넓어지더니 넓은 개활지가 나오고 노란 조끼를 걸친 라이더 하나가 쉬고 있다. 동지를 만난 기쁨에 차선을 가로질러 그쪽으로 향한다. 제리 모리슨(Jerry Morrison). 고향인 일리노이 주 데카투르(decatur)에서부터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시작하여 시애틀에서 그 막을 내릴 계획이다. 우리는 함께 전열을 가다듬고 고지 정복을 향한 첫 페달을 밟았다.

1만1000ft를 넘어서면서 산소가 더욱 희박해졌다.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꼈다. 핸들을 더욱 꽉 쥐었다. 심장 소리가 요동치는 가운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표지석 하나가 서 있고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에서 가장 높은 지점. 1만1542ft(3518m)를 자랑하는 후지에(hoosier) 패스. 고된 만큼 보람도 커서 이제 여행을 다 마쳤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제리 아저씨와 함께 기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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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자의 쾌감. 콘티넨탈 디바이드(Continental Divide)이자 가장 높은 도로인 후지에 패스(Hoosier pass) ⓒ 최성규


기쁨도 잠시. 바로 무덤덤해진다. 자전거로 북미 최고의 산맥을 넘었다는데 감흥이 금방 끝나버리다니. 제 아무리 힘들어도 끝을 본 사람에게는 동네 뒷산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래서 모든 게 덧 없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나와 같이 페어플레이에서 출발했던 제리 아저씨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20마일 떨어진 프리스코(frisco)에서 하루 일정을 마감한다. 난 그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내리막길인데 그 정도는 준비체조 감도 안 된다. 나는 크렘링(Kremmling)으로 정했다. 65.5mile.

길은 기대 이상이다. 급격한 커브 길에서 차량은 속도를 줄이고 자전거만 제 세상을 만난 듯 잔뜩 활개를 치고 다녔다. 내가 할 일이라곤 브레이크 잡는 일 뿐. 브레켄리지(breckenridge), 프리스코(frisco), 실버쏜(silverthorne)를 시속 17마일의 파죽지세로 나아간다.

반면에 하늘은 심상치 않다. 자전거가 향하는 북쪽은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5시도 안 되었지만 사방은 어둡다. 경험상 큰 비를 피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크레믈링을 버린다. 인적 드문 CR 30번 도로가에 위치한 맥도날드 플래츠(McDonald Flats) 캠핑장을 발견하고 쏘옥 들어갔다.

취수시설조차 없는 빈약한 캠핑장이다. 큰 일이 생겨도 모를 만큼 한적한 캠핑장에 다행히 히스패닉 계 가족이 캠핑카를 끌고 발을 들였다. 시끌벅적한 그네들에게 부탁해 물 한 통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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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속의 고독. 시끌벅적한 히스패닉 가족들 곁에서 나홀로 야영을 하다. ⓒ 최성규


한 숨 돌리며 캠핑장을 휘 둘러보았다. 바로 옆 그린 마운틴 저수지(green mountain reservoir)에 블루 리버(blue river)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모여들고 있었다. 세 사람이 낚시를 한다.

할아버지 찰스(Charles)와 그의 딸 바바라(barbara), 손자 제이크(Jake)는 덴버(denver)에서 왔다. 낯선 동양인을 발견한 이들은 내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물을 구한다고 하자 그 즉시 얼려놓은 생수 3병을 품에 안겨준다. 물 하나 없는 열악한 캠핑장에서 순식간에 쓰고도 남을 물을 얻게 되었다.

"여행하면서 죽은 소나무들 못 봤나? 딱정벌레가 소나무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 나무는 말라죽지. 아주 심각한 문제야."
"살충제는 효과가 없나요?"
"수많은 나무에 일일이 살충제를 뿌려야 하는데 불가능한 일이야. 과학자들이 말하는 방법이 있긴 하지. 0도 이하의 기온이 20일 이상 지속되면 딱정벌레는 전멸이야. 헌데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최근 몇 십년 동안 그렇게 추워지지가 않아."

땅거미가 질 무렵 이들은 덴버로 다시 돌아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큰 도움을 준 가족. 텐트 속으로 들어가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부스럭거리는데 히스패닉 계 가족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비 오는 록키 산맥에서 나 홀로 텐트가 적막하다. 
#미국 #자전거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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