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가 개척한 8세기 실크로드 지도. 하트코리아에서 디지털화한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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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초 아래 실크로드를 볼 때 그 역사적 의미는 우선 이 길이 한 문명권을 뛰어넘어 다른 문명권을 이어준 문명 교통로라는 점이다. 페르시아의 고속도로이든, 진시황의 길이든, 로마인의 로마 가도이든 주요 간선 도로는 모두 한 문명권 내에서 만들어 운용된 길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길들이 뛰어난 기능을 한 것이 틀림없지만 어느 길도 동서양을 이어 주질 못했다. 그 길들은 모두 히말라야, 파미르 고원, 타클라마칸 사막, 곤륜, 천산(톈산) 산맥을 넘지 못하고 각각의 제국 경계 내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에 비해 실크로드는 적어도 1천 년 이상 동서양을 잇는 길로써 역할을 해 왔다.
또한 실크로드는 기본적으로 민간 부문에서 용기 있는 개인들에 의해 개척되었다는 점이다. 위에서 본 고대 길들은 모두 정치적 통치자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길이었다. 수많은 노예들이 동원되어 길을 닦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크로드는 개인들이 경제적 목적하에 미지의 세계와 접촉하였고, 그 접촉이 또 다른 접촉을 낳음으로써 수만 리 길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초 한무제가 장건을 시켜 서역을 개척하였고 그것이 실크로드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장건이 실크로드를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장건도 이미 놓여 있는 길을 갔을 뿐이다.
나아가 실크로드는 문화의 전파로로서 역할을 다한 길이었다. 처음에는 상인들의 물물교환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이 길이 시간이 가면서 문화전파의 열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용되었다. 문화전파에서 핵심은 역시 종교였다. 오아시스길이라 불리는 실크로드는 기원 전후부터 천여 년 동안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를 동서양으로 전파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다. 만일 이 길이 없었다면 고대 동서양의 종교판도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크로드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자 하는 모험가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 상징이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알고자 하는 것을 본능으로 간직한 존재이다. 모험가들은 이 실크로드를 통해 그러한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14세기 마르코 폴로는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통해 북경을 방문한 다음 <동방견문록>을 써 서양 사람들에게 동양을 알렸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만이 그런 모험심을 가졌겠는가. 실크로드가 동서양을 연결하는 동안 이름 없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이 길을 이용해 동서양을 왕래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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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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