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부평 신트리공원에서 찍은 사진.
성효숙
공부 말고는 잘하는 것 없는 조용한 소년가다가 가다가 / 울다가 일어서다가 / 만나는 작은 빛들을 / 시(詩)라고 부르고 싶다 (중략) 때때로 스스로의 맨살을 물어뜯는 / 외로움 속에서 그러나 / 아주 겸손하게 작은 목소리로 / 부끄럽게 부르는 이름을 / 시라고 쓰고 싶다(1984년 첫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에 실린 '서시' 중에서)시인은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달구지가 지나가면 먼지가 폴폴 날리는 시골 동네였다. 시인은 일곱 살 동갑내기가 초등학교에 간다고 하자, 자신도 학교에 보내달라며 부모를 졸랐다. 그 친구는 1월생, 시인은 9월생이었다. 당시는 학교를 제때 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 시인은 다른 친구들보다 한두 살 어렸다. 고향 친구인 허정균(58, 환경운동가)씨는 "영근이는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늘 혼자였다, 공부 말고는 잘 하는 것이 없는 조용한 친구였다"며 시인을 기억했다.
시인은 중학교 입학을 위해 5학년 때 익산으로 전학한 후, 셋째 이모 집에 거주하며 중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매년 서울대를 100명씩 보낸다'던 명문고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전주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유신에 반대하며 전주고 자퇴, 문학 꿈 안고 상경 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인 1973년은 대통령인 박정희의 독재에 반대한 반유신체제운동이 전국에서 들풀처럼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8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돼, 9월부터 반독재·반체제를 외치는 대학생의 시위가 거세졌고, 이는 점차 전국 고등학교에까지 퍼져나갔다. 이에 맞서 박정희는 1974년 1월 긴급조치1·2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했다. 4월에는 긴급조치4호를 발동해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도 금지했다.
정치적 격랑 속에 전주고 1학년이었던 시인은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폐간 처분 당한 <사상계>와 <창작과 비평>을 구해 읽고, 김지하나 고은, 황석영, 이호철 등 당시 독재에 반대하던 이들의 문학을 접했다. 학급 '홈룸(home room)'시간에 시국관을 발표해 담임선생을 당황하게 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일로 그는 학교에서 '요주의 인물'이 됐다.
당시 긴급조치4호에는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위반한 학생을 문교부 장관이 퇴학 또는 정학처분을, 그리고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의 폐교 처분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 때문일까. 교장이 직접 나서 시인의 생각을 돌려보려고도 했다고 한다.
시인은 1학년 겨울방학 직전,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남해 여행을 떠났다. 이미 학교를 그만 둘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2학년이 되기 직전, 자퇴서를 제출하고 문학을 하겠다는 꿈을 품고 서울로 왔다. 시인은 서울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형 박정근과 함께 생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