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 드문 길에 후보 현수막, 왜 걸렸나 했더니...

대통령 선거운동 첫날, 포항 호미곶 풍경

등록 2012.11.28 17:03수정 2012.11.28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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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포항제철을 따라가며 걸려 있는 현수막

포항제철을 따라가며 걸려 있는 현수막 ⓒ 정만진


포항 시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왼쪽이 포항제철 담장, 오른쪽이 해병대 담장이다. 그런데 오늘은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다.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첫날부터 잽싸게 후보들이 내건 현수막이 낯익은 거리를 조금은 눈설게 만든 까닭이다.

가야 할 길은 25km 정도. 그러나 길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산과 바다를 끼고 굽이굽이 도는 좁은 해안도로이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도 멀고, 실제로도 한참을 가야 한다. 들판의 국도나 고속도로라면 20분 정도로 충분하겠지만 이 길은 그 두 배 가량 되는 40분을 내놓으라고 한다.


a  호미곶 공원 입구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들어갈 때는 몰라도 최소한 나올 때에는 이 현수막을 아니 볼 수 없다. 삼거리 정면에 붙어 있기 때문.

호미곶 공원 입구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들어갈 때는 몰라도 최소한 나올 때에는 이 현수막을 아니 볼 수 없다. 삼거리 정면에 붙어 있기 때문. ⓒ 정만진


그럭저럭 호미곶공원 앞에 도착했는데 또 현수막이 걸려 있다. 직진하면 울산까지 내려가고, 좌회전을 하면 바로 공원 안으로 들어가는 삼거리의 오른쪽 정면에 '새 시대를 여는 첫 대통령'과 '세상을 바꾸는 약속'이 자리를 잡았다.

들어갈 때는 혹 못 볼 수도 있겠지만 나올 때엔 아니 볼 수 없는 자리이니 그야말로 '명당'이다. 이곳은 16세기 풍수지리학의 대가 남사고 선생이 "우리나라 지형상 호(虎)랑이 꼬리[尾]에 해당되는 땅[串]으로 천하 제일 명당"이라고 갈파한 이래 '호미곶(虎尾串)' 이름을 얻은 장소인데, 대선 후보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던가 보다. 현수막이 아래위로 한 자리에 달려 있는 것을 보면. 

a  호미곶 공원의 등대 박물관

호미곶 공원의 등대 박물관 ⓒ 정만진


공원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등대 박물관'이 나그네를 유혹한다. 나라 안에 하나뿐인 국립 등대박물관이다. 아니나 다를까, 건물을 쳐다보니 '국립' 두 글자를 '등대박물관'보다 앞에 자랑스럽게 붙여 두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온 뒤 동해 쪽을 바라보면 푸른 유리로 만든 돔형 비슷한 건물이 바다의 이미지를 뽐내며 서 있다. 건물 빛이 '해양관'이라는 이름과 썩 잘 어울린다.

a  돌에 쓰인 한자 '한반도 최동단 호미곶'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으리라. 그렇다면? 이 돌을 세워둔 까닭이 의심.

돌에 쓰인 한자 '한반도 최동단 호미곶'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으리라. 그렇다면? 이 돌을 세워둔 까닭이 의심. ⓒ 정만진


해양관 뒤쪽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쪽인 호미곶' 끝이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돌 바로 뒤로는 시퍼런 수평선이 출렁인다.


그런데 '韓半島 最東端虎尾串(한반도 최동단호미곶)'이 뭐야? 특히 '韓'과 '虎'는 서체가 현란하여 한자를 좀 아는 사람도 읽기에 어렵다. 지금은 물론이고 장차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 뻔한데 왜 이렇게 한자로 새겨놓았을까? 모양, 조경 등으로 미루어 보아 건립된 지도 얼마 안 된 듯한데. 옛날엔 한자, 요즘은 서양어 아는 걸 지나치게 과시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이 표지석은 누가 세웠을까? 돌 뒤에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피러 갈 마음은 없다. 내 마음은, 국민 세금으로 여기저기 제 이름을 남겨놓는 자들까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너그럽지 못하다.


a  호미곶은 우리나라의 호랑이 꼬리에 해당되는 지점이다. 호미곶 공원에서 보는 호랑이 조형. 아래로 수평선이 보인다.

호미곶은 우리나라의 호랑이 꼬리에 해당되는 지점이다. 호미곶 공원에서 보는 호랑이 조형. 아래로 수평선이 보인다. ⓒ 정만진


표지석에서 오른쪽에 호미곶 등대가 있다. 경상북도 기념물 39호인 이 등대는 1908년에 건립되었는데, 높이가 26.4m나 되지만 철골을 쓰지 않고 벽돌만으로 쌓아올려졌다. 물론 지금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옛날 등대 안을 못 보는 아쉬움을 달래는데 샛문으로 현대적 아름다움을 뽐내는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인파'가 보인다. 박물관과 옛날 등대를 둘러볼 때까지만 해도 옆에 사람이 없었는데 모두들 여기 모여 있다. 많은 사람들 탓에 사진 찍기가 어렵다.

두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이래서 대선 후보들이 이곳 입구에다 현수막을 내걸었구나. 동네 사람들은 거의 걸어다니지 않는 길인데도 외지인들이 이렇듯 많이 오니 선거용 명당터로 판단한 게로구나.

그리고 또 하나, 우리나라 국민들은 머리 아픈 것을 싫어해서 읽고 생각하는 것을 멀리한다더니 과연 그런가 보다. 박물관 내부와 닫힌 등대의 안내판, 머리만 아프지! 찾아온 사람들은 많지만 대부분 바닷가만 맴돌다가 돌아가는 게 설핏 보아도 확연하다. 

호랑이 조형으로 다가선다. 숭숭 뚤린 줄무늬로 산맥을 형상화하면서 그리로 드센 바닷바람을 통과시켜 안전성도 확보한 착상이 돋보인다. 2009년 1월 1일, 포항시 승격 6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호랑이상이다. 구태의연한 돌조각 호랑이가 아니라서 기념물을 세운 취지가 제대로 살아났다.

왼쪽으로 유명한 '상생의 손' 중 하나가 동해 바닷물 속에서 나를 부른다. 호미곶의 '꽃'이 출렁이는 물결과 함께 부르니 달려가지 않을 수 없다.

호미곶 해맞이 축전의 상징물인 '상생(相生)의 손'은 바닷물에 세워진 오른손과  땅에 세워진 왼손이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다. 그렇게 배치된 것은 서로[相] 도와가며 살자[生]는 뜻의 구현으로, 작품의 이름을 정한 근거이기도 하다. '새 시대를 여는'과 '세상을 바꾸는'이 소리는 달라도 뜻은 같은 동의어인 것처럼.

a  새해 첫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호미곶을 찾아본 사람들에게 눈에 익은 광경. 이 조각은 바닷물 안에 서 있다.

새해 첫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호미곶을 찾아본 사람들에게 눈에 익은 광경. 이 조각은 바닷물 안에 서 있다. ⓒ 정만진


호미곶공원에는 잊지 않고 꼭 보아야 할  볼거리가 하나 더 있다. 등대박물관, 호미곶 등대, 상생의 손에 이은 4대 구경거리다. 그 이름 '연오랑 세오녀 상'.

연오랑과 세오녀는 157년(신라 8대 임금 아달라왕 4년)에 왜로 건너간 부부다. 처음에는 연오 혼자만 갔다. 바닷가에서 해초를 따던 중 갑자기 큰 바위가 그를 왜로 실어갔다. 왜인들이 그를 임금으로 모셨다.

세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바닷가로 갔다가 연오의 신발을 발견했다. 그때 다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 그녀도 왜로 실어갔다. 그녀는 연오를 만나고, 귀비가 되었다.

갑자기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점을 치니 연오와 세오가 왜로 건너간 때문으로 나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연오와 세오에게 돌아오라고 했지만 둘은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라 돌아갈 수는 없고, 그 대신 비단을 드릴 테니 제사를 지내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신이 돌아온 후 아달라왕은 비단을 모셔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과연 해와 달이 다시 빛을 찾았다. 그 이후 왕이 제사를 지낸 곳은 영일(迎日)이라 부르게 되었고, 비단을 넣어 놓은 창고에는 '귀비고'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일은 포항의 본래 지명이다.

a  호미곶공원에 세워져 있는 연오랑과 세오녀

호미곶공원에 세워져 있는 연오랑과 세오녀 ⓒ 정만진


설화는 연오랑과 세오녀가 헤어지지만 다시 바다 건너까지 가서 재회하여 잘 살아가고, 그들의 도움으로 신라도 본래의 온전한 삶을 되찾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신라인이 건너가 왜를 세웠다는 사실도 전한다. 세상 사람들은 어디 살든 모두가 사해동포(四海同胞, 김구 선생의 표현)요, 상생을 이룩해야 할 인류애의 실천자라는 교훈을 주는 설화인 것이다.

연오랑세오녀상을 떠나 공원 밖으로 나오니 예의 현수막들이 다시 정면을 가로막는다. 새 시대를 열겠다는 사내와 세상을 바꾸겠다는 아낙이 서로 다투고 있다.

'새 시대를 여는' 사내가 되고 '세상을 바꾸는' 아낙이 되겠다는 것이 진정으로 두 사람의 본심일까. 만약 그렇다면 어찌 사회가 지금 같이 되었을까. 두 사람이 정말로 소리는 달라도 뜻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면 소통과 대화를 거쳐 상생에 이르지 못할 까닭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영일 호미곶.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첫날 이곳에 와서 빈부 격차 심화 등에 짓눌려 곧 폭발하지도 모르는 우리의 앞날에 대해 생각해본다. 과연 하늘의 해가 아침마다 떠오르듯이 사회에는 언제 그렇게 밝은 빛이 날마다 비치려나.

a  돌아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현수막은 여전히 그대로 붙어 있다. 함부로 떼면 선거법 위반.

돌아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현수막은 여전히 그대로 붙어 있다. 함부로 떼면 선거법 위반. ⓒ 정만진


#호미곶 #박근혜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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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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