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전쟁.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인천차이나타운에 전시된 고대 중국군의 전투 장면.
김종성
진덕여왕이 왕위에 있던 649년에 백제군이 신라를 공격했다. 열흘이 지나도록 결판이 나지 않고 사상자만 속출했다. 전사자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할 정도였다. 지친 신라군은 도살성, 즉 지금의 충남 천안 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하늘의 물새가 김유신의 군막 위를 지나갔다. 그러자 신라군 병사들이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물새가 사령관의 군막 위를 지나간 것을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인 것이다. 시험 직전의 수험생이 사소한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듯이, 고도의 긴장감을 느끼는 병사들도 이처럼 사소한 것에 불길함을 느낄 수 있다.
김유신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공포심이 이미 크게 확산된 상태라면, 공포심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었다. 공포심의 초기 단계였던 것이다. 감기로 치면, 아직 기침을 하는 단계는 아니고, 몸속 어딘가가 좀 피로한 듯한 느낌이 드는 단계였다.
김유신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그는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부하들을 다독거린 뒤 곧바로 전투 개시를 명령했다. 전투는 신라군의 승리로 끝났다.
만약 공포심이 크게 확산된 뒤였다면, 김유신은 비담의 쿠데타 때처럼 쇼를 벌이고 제사를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그는 병사들 앞에서 자신감을 보여주고 그들을 신속히 전투로 몰아넣었다.
김유신은 병사들이 물새 출현의 의미를 두고 한가하게 속닥거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병사들의 머릿속에서 공포심이 번질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전투 개시명령을 내렸다. 전투 개시로 인한 긴장감이 초기 단계의 공포심을 억누르도록 한 것이다.
만약 김유신이 없었다면....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백제 멸망 이전에 신라군은 백제군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신라군이 한 수 아래였다. 그래서 정상적인 경우라면 신라군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김유신 부대만큼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기편 진영의 공포심을 통제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사들 심리 속의 공포심을 없애고 그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도록 함으로써 백제군의 우수한 전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만약 김유신 같은 군사 기술자가 없었다면, 신라는 당나라군과 합세하기 전에 백제 의자왕의 공세 앞에서 쉽게 허물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의자왕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신세가 뒤바뀌고 오히려 '김춘추의 삼천궁녀 신화'가 오래도록 회자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