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아키노, 너무 다른 <타임> 표지

[대선특집- 한국인을 위한 필리핀 현대사 ②]

등록 2012.12.11 16:54수정 2012.12.1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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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를 바꾼 여인'이란 제목의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사진(좌)과 '독재자의 딸'이란 제목의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사진(우).

'아시아를 바꾼 여인'이란 제목의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사진(좌)과 '독재자의 딸'이란 제목의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사진(우).


최근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타임지 표지모델로 뽑혔다. 내용은 꽤나 불명예스러울 수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여당은 매우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Strongman's daughter'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뜻인데 이를 '실력자의 딸'이라고 번역했다. 이명박 대통령 집권 초기부터 '오륀지'라는 말을 유행시키며 영어몰입교육을 강조했던 한나라당 출신 인사들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터무니없다.

몰라서 잘못 번역한 것인지 일부러 오역한 건지 헷갈린다.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으니까 선수를 써서 대중들을 현혹하려고 한 것 같다는 의심도 든다. 

새누리당(전신 한나라당) 인사들의 팩트(fact)를 속이는 듯한 태도는 영어 오역뿐만이 아니다. 최근만 하더라도 박근혜 후보의 광화문 유세 사진 조작 사건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새누리당은 본인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발끈했고 철저한 조사를 주문했지만, 사실이 밝혀지지 않고 묻혀 갔다면 새누리당에 유리한 게 사실이다. 만약 디도스 사건 때처럼 새누리당 관계자가 연루되었다고 밝혀진다면 박근혜 후보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이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대통령 만들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정몽준 의원의 선거운동도 실수인지 고의인지 모르지만 사실과 다르다. 코라손 아키노가 이미 필리핀의 대통령을 했다. 그녀는 20년 마르코스 독재를 종식시키고 국민항쟁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필리핀의 대표적 '민주시민'으로 불린다. 이외에도 정권교체 후 병원연금 상태에 처해진 필리핀의 전임 대통령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도 여성이다. 

이번 글은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김대중의 대결, 6·10 민주항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획득한 한국의 상황과 필리핀의 현대사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기자의 말>  

  연재순서
  ① '반일투사' 마르코스와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이 되다.
  ② 마르코스의 계엄령과 박정희의 유신체제, 민주투사 아키노와 김대중, 필리핀의 피플파워와 한국의 6·10 민주항쟁
  ③ 정권교체후 병원연금된 아로요 전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미래
  ④ '독재자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와 '독재자의 딸' 박근혜,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후보  

마르코스의 계엄령과 박정희의 유신체제


마르코스는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필리핀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1969년 대통령 선거는 마르코스 쪽에서의 대대적인 폭력, 사기, 부정으로 얼룩진 선거였다. 이듬해 필리핀대학 학생들을 필두로 대학생들은 "1사분기 폭풍항쟁"이라 불리는 거대한 저항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은 점차 급진화되어 화염병과 사제폭탄을 가지고 경찰에 대항하기도 했다.

마르코스의 독재는 역설적이게도 공산당 활동을 활성화시켰다. 독재가 계속되자 폭력적인 방법을 쓴다 할지라도 마르코스를 비판하고 타도하려는 모든 세력들에 대해 국민들이 지지한 것이다. 결국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마르코스는 중임을 넘어 '3선' 그리고 영구집권을 꾀하게 된다.


계엄령 선포 이전에 일어난 주목할 만한 사건은 미란다 광장 폭파 사건이다. 마닐라의 유명한 교회 중 하나인 끼아뽀 교회 옆에 미란다 광장이 있다. 야당인 자유당(Liberal Party)은 1971년 8월 다가오는 상원의원, 지자체 선거 승리를 위해 미란다 광장에서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자유당 후보들이 연단에 섰을 때 갑자기 수류탄 두 개가 단상 위로 날아왔다. 많은 사람이 다쳤고, 부상자의 대부분은 자유당 후보였다.

범인은 잡지 못했다. 물증은 없지만 마르코스의 국민당(National Party) 소행이라고 대부분 믿었다. 그런데 마르코스는 이 사건을 이용해 영장체포제도(Previlege of Writ of Haveas Corpus)를 일시 중지시키고 야당 인사들과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체포했다. 여러 정황상 야당과 반정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정부가 조작한 사건으로 보인다. 

마르코스는 민간인 출신 대통령으로는 드물게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가 1972년 9월 21일이었다. 한국의 10월 유신이 선포되기 직전이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9월 이전에 계획된 것 같지만 필리핀의 마르코스를 깊이 연구한 것은 분명하다. 마르코스는 '신사회', '신필리핀' 창조를 내세우며 근면, 규율을 강조했다. 왠지 새마을운동과 많이 닮았다.

마르코스는 "모든 농민들은 관개 토지 3ha 또는 미관개 토지 5ha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토지개혁령을 발표해 인기를 끌려고도 했다. 부정, 억압, 비행, 태만 등을 금지하는 대통령령도 발표해 '신사회' 건설의 의지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계엄령 첫해에만 반짝하고 둘째해부터는 각종 부패 등이 반복, 재연되었다.

자정에서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 조치가 선포되고 반상회가 조직되었다. 대통령령 86호는 반상회 조직을 명령했는데 마을일에 관해 서로의 의견 교환, 토론, 참여 등을 명목으로 했다. 박정희 유신체제하의 사회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이때는 필리핀이 우리를 상당히 앞선 국가였으므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마르코스의 계엄령을 따라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마르코스는 이듬해 개헌을 해 일종의 유신 헌법을 만들었다. 몇 가지 주요 내용을 보면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바꾸고 마르코스가 행정부 수반으로서 대통령직과 내각 수반으로서의 총리직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 양원제 의회를 단원제로 교체, 계엄령 하의 선거 유보로 마르코스의 임기 자동 연장 등이 있다.

계엄령 하에 필리핀은 암울했다. 위협, 구속, 강간, 살인, 신체적·정신적 고문 등 악랄한 형태의 인권탄압이 자행되었다. 계엄령 초기 경제는 반짝하고 성장했지만 차츰 인플레, 부패, 친인척 비리 등으로 경제는 악화되었다. 진보적 지식인, 청년학생, 성직자, 노동자, 농민, 여성그룹, 예술가 등이 계엄 독재에 저항했다.

그러한 저항의 중심에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가 있었다. 유신체제하 한국의 저항운동처럼 8년간의 계엄동안에 필리핀 민중의 반 계엄령 시위는 거세었다. 결국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철회한다고 발표하고, 1981년 다시 대통령 선거를 하였다. 마르코스가 압승했지만 이 선거가 정말 민주적 선거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박정희의 유신 체제도 마르코스의 계엄령 체제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쌍벽을 이루는 독재체제였다. 자동으로 대통령의 임기가 연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간접선거를 실시하면서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하였다.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었고, 헌법의 효력까지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이 대통령에게 부여되었다.

유신헌법안이 통과한 지 한달 만에 계엄령이 해제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2359명의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대통령에 단독으로 입후보한 박정희에게 2357표의 찬성표가 나왔다. 두표의 무효표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박정의'라고 써서 무효가 되었다. 투표에 참여했던 대의원조차 그것을 민주주의라 생각했을지 의문스럽다. 한국의 민중들 역시 필리핀 민중들처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투쟁하였다.

박정희의 대항마 김대중, 마르코스의 라이벌 아키노

박정희의 가장 큰 대항마로 김대중을 꼽을 수 있다면 마르코스의 대척에는 현 대통령의 아버지 니노이 아키노가 있다. 아키노와 김대중도 많은 부분에서 비교할 만하다. 니노이 아키노는 17세에 마닐라 타임즈의 통신원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취재한 경력도 있다. 22살의 젊은 나이로 시장이 된 그는 27살 최연소 부주지사가 되고 이어 고향인 딸락의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1968년, 첫번째 상원의원 임기중 아키노는 마르코스가 필리핀을 병영국가로 만들려고 한다며, 줄곧 마르코스 독재의 강력한 비판자가 되었다.

1973년 유력한 대선후보였으나 계엄령으로 인해 출마할 수 없었다. 어쩌면 마르코스가 3선개헌이라는 카드를 뛰어넘어 바로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한국에서의 경험을 고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미란다 광장 폭파사건 이후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아키노를 첫 번째 희생양으로 삼았다. 국가 전복 등의 날조된 죄명으로 투옥된 아키노는 40일간의 단식투쟁 등으로 계엄령에 저항하였지만, 마르코스 정부는 유죄판결과 사형선고로 응답하였다.

결국은 형량이 감소되었으나 7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심각한 심장병을 얻은 그는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고 해외에서도 반 마르코스 반독재 운동을 벌이며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아키노가 마르코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독재체제를 비판했던 김대중과 그런 그를 일본에서 납치해 죽이려 한 박정희의 관계도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국민혁명: 피플파워와 6·10 민주항쟁

 비행기에서 내리는 니노이 아키노. 군인들이 호송하고 외신기자들은 따라 내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A Nation Reborn>에 실린 사진

비행기에서 내리는 니노이 아키노. 군인들이 호송하고 외신기자들은 따라 내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에 실린 사진 ⓒ


1981년 계엄령이 철회되고 마르코스가 이해할 수 없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아키노는 마르코스 독재 비판을 계속하며 귀국을 결정한다. 아키노는 투옥 또는 암살될 것이라는 거듭되는 경고와 협박을 받았다. 하지만 1983년 8월 아키노는 3년 만에 귀국 비행기에 오른다. "암살자의 총탄에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그렇게 받아들이겠다"는 말과 함께.

마닐라 국제공항(현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아키노는 일단의 정부측 군인들에게 호송되어 트랙을 내려왔다. 동승했던 외신 기자들은 비행기에서 그를 취재한 것이 마지막이었고, 함께 트랙을 내려오지는 못했다. 트랙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총성이 울렸다. 호송하던 군인에 의해 아키노는 즉사하였다. 총을 쏜 군인도 활주로에 있던 다른 군인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정부는 사살 군인인 갈만(Galman)이 공산당의 사주를 받았다는 황당한 발표를 하였다.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87년 6월 민주항쟁은 1년 전에 일어난 필리핀의 에드사 국민혁명의 영향을 약간이나마 받았음이 분명하다. 니노이 아키노의 사망 이후 거대한 반정부 투쟁이 일어났다. 거리는 아키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으로 가득찼고, (흥미로운 것은 김대중 대통령과 현 야당후보 문재인의 선거 상징도 노란색이라는 것이다) 시민들은 마르코스 독재를 규탄하였다. 마르코스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아키노 암살 조사위원회'를 발족한다고 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마닐라 교구의 씬 추기경은 이러한 움직임에 분명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마르코스는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비상선거로 돌파하려고 하였다. 1986년 비상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마르코스의 상대는 아키노의 미망인인 코라손 아키노였다. 1986년 국회는 마르코스의 당선을 발표했지만 민중들의 개표기구 남프렐(NAMFREL, 자유선거 국민운동본부)은 코라손의 승리를 발표하였다. 두명의 "당선자"가 각각 당선수락연설을 하는 웃지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독재자와 민중의 대치 상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태에 균열을 낸 것은 국방장관 엔릴레와 부참모총장 라모스가 마르코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사건이었다. 엔릴레는 이미 마르코스의 부정선거에 반기를 들 생각을 하고 라모스와 접촉했다. 한편, 이런 소식을 접한 마르코스는 이들이 소속된 '군부개혁운동'의 인사들을 체포했다. 엔릴레와 라모스, 그리고 "개혁운동" 소속 장교들은 도심지의 아기날도 캠프로 피신하였다. 씬 추기경이 시민들에게 캠프 아기날도로 모여 "민주주의"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가톨릭 국가 필리핀에서 신 추기경의 영향은 대단했다. 몇 시간 만에 메트로 마닐라의 중심도로인 에드사(EDSA) 거리에는 시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마르코스는 아기날도 캠프에 있던 아키노의 지지자들에게 폭탄을 투하하고 거리의 민중들을 탱크로 밀어버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은 마르코스를 제지하였다. 전세계로 생중계되는 피플파워가 유혈참사로 얼룩진다면 그동안 마르코스 독재정부를 지원했던 미국은 말할 수 없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에드사 거리의 탱크 앞에는 시민들이 꽃을 두고 수녀들이 기도를 하며 비폭력으로 저항하였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필리핀의 국민혁명은 피 대신 땀과 열망으로 쟁취되었다. 마르코스와 아키노의 대치상태는 계속되고 양쪽 모두 대통령 취임연설을 하는 희극이 다시 한 번 발생하였다. 아키노가 연설한 '클럽 필리피노'와 에드사 거리에 운집한 국민들은 아키노를 상징하는 노란색 셔츠를 입고 'Bayan ko'(나의 조국, 한국으로 따지면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노래)를 부르며 아키노의 취임을 축하하였다. 방송국을 비롯한 주요 시설은 점점 아키노 쪽에 점령되고 있었다.

미국의 자문을 구한 마르코스는 미국이 더 이상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엔릴레에게 자신의 안전 출국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마르코스 일가는 자정을 기해 클락 공군기지로 피신한 후 괌을 거쳐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이 때가 1986년 2월 26일이었다. 대통령궁이었던 말라까냥 궁 지하에서 영부인이었던 이멜다의 호화 구두가 3천여 켤레나 나왔다는 것은 이미 해외토픽이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필리핀과 한국사의 유사성에 놀랐을 것이다.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민주화 시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민주화운동 참여, 명동과 서울시청 광장 주변을 가득 메운 시민들, 거리에 운집한 군중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최루탄 속에서 버티는 사람들, 탱크 대신 선택된 6.29 선언, 대통령 직선제 선거 등등. 그리고 마르코스의 하와이 망명은 이승만을 떠올리게 한다. 왜 독재자들은 하와이를 좋아하는지. 마르코스는 지병과 홧병으로 얼마 못 살고 하와이에서 죽었다.

이멜다 마르코스와 자녀들은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와 고향마을에서 하원의원, 상원의원, 주지사 등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정치인의 공과와 무관하게 고향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필리핀에서 고향출신 정치인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우리나라 독재자의 경우보다 못하지 않다.

다음 호에서는 정권교체 후 부정부패로 인해 병원에 연금된 아로요 전 대통령과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의 미래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양두영 기자는 국립필리핀대학에서 필리핀 역사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니노이 아키노 #마르코스 #코라손 아키노 #문재인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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