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의 날 기념 행진에서 센미고도 배너를 만들어 행진에 참여하고 있다. 배너를 들고 앞에서 행진하는 데이빗씨도 한국에서 15년간 일을 하고 온 이주노동자다. 돌아온 지 오래 되지 않은 그는 한국에서 노동운동을 경험했고, 네팔에 돌아와서도 이런저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김성민
노동자로 간 한국에서 운동가가 돼 돌아온 샤말. 원래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 가족과의 갈등은 없는지, 어떻게 운동을 시작했는지 물어봤다.
"할아버지, 아버지 다 고르카 용병이셨어요. 근데 똑같은 군대인데 임금이나 연금 등 차별이 있었죠. 아버지가 그 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의 생각도 이해해주셨죠. 저도 원래 고르카에 들어가려고 2번이나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그때 한국으로 돈 벌러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가서 한 3년 '빡시게' 일해서 돈 많이 벌어오자고 생각하고 갔어요"고르카는 영국이 네팔사람을 뽑아 구성하는 군대, 즉 용병이다. 용맹하기로 소문난 네팔사람들을 훈련시켜 식민지에서, 2차 대전에서, 전후 동남아시아 영국군에서 계속해서 사용한 것이다. 지금도 고르카는 네팔의 젊은 남성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같은 영국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임금과 연금 등 차별이 있었고 아버지는 전역 후에 그 차별과 싸우는 활동을 했다. 샤말이 겪은 차별과 비슷한 것이었다.
"IMF가 되니까 일이 확 줄었어요. 집에서 노는 날이 많아져서 신문배달을 시작했어요. 새벽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신문배달을 하고 출근했는데 비가 많이 오던 날 트럭에 박았어요. 일을 더 할 수 없었고 치료받을 돈도 없는데 마침 한 이주노동자센터의 도움을 받게 됐어요. 거기서 쉬고 있는데 매일 여러 가지 문제를 겪는 이주노동자들이 센터로 찾아왔어요.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뭔가 해야겠다 싶었죠."산업연수생 제도의 모순 때문에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돼야 했던 샤말의 코리안 드림은 IMF와 사고를 겪으면서 무참히 깨졌다. 하지만 그때 만난 이주노동자 센터의 도움, 다른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접하면서 그는 운동을 하게 됐다.
여러 사람들과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나 노동운동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그는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하는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노조활동을 시작했다. 이주노조의 전신인 평등노조 활동을 하고 2003년 고용허가제 통과 이후 농성투쟁을 하다가 강제추방을 당한 그의 한국 생활은 한국의 이주노동 운동의 살아있는 역사라 할 만하다.
돈 벌러 간 샤말은 운동가가 돼서 고향에 돌아왔다. 부푼 꿈을 안고서 찾은 한국은 그를 바꿔놓았다. 거의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가 인터뷰 내내 보여준 예의와 말투는 한국인의 그것이었다. 젊은 시절의 배낭여행 한 달도 인생을 바꾼다는데 청춘의 10년을 한국에서 보낸 그의 인생은 오죽할까. 인권침해와 차별에서 시작한 그의 운동은 이주노동자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노동자의 관점에서, 보다 넓은 관점에서 하는 운동으로 바뀌어갔다.
강제추방은 끝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다른 위치에서 노동운동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한국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노동이 국경을 넘었고 그의 삶은 운동이 됐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라'는 누군가의 강령은 아직 먼 얘기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몇 명의 노동자가 죽음을 택했다. 추방 이후에도 계속해서 국경을 넘는 운동을 하고 있는 그의 삶이 절망의 시대에 하나의 사례가 됐으면 한다. 운동이 국경을 넘으려는 노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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