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 효창원에 있는 '3의사 묘역'은 해방후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이 조성한 것으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비석이 없는 왼쪽 끝은 안중근 의사의 가묘.
정운현
윤주경씨의 경력을 살펴봤다. 그가 박근혜 당선인의 정권인수위원회에 참여하기 전 도대체 무슨 일을 해왔는지 궁금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그의 사회활동 경력은 크게 세 가지였다.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이사, 월진회 이사, 독립기념관 이사였다. 그중 생소한 이름이 '월진회'였기에 확인해보니, 1929년 4월에 윤봉길 의사가 만든 조직으로서 '날로 앞으로 나아가고 달마다 전진한다'는 취지의 단체였다. 결국 따져보면 그는 할아버지인 윤봉길 의사와 관련된 일만 해온 것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정신'이다. 그들의 후손이 오늘날 어떻게 처신하냐에 따라 친일파 조상의 이름이 더 비난받을 수도 있고 또한 항일 독립운동가의 후손 역시 그들의 잘못으로 영광된 조상의 이름에 누를 끼칠 수도 있다. 결국 과거의 조상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살아가고 있는 그 후손의 처신에 따라 비난도, 영광도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윤주경씨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치세'를 위해 독립운동가인 '할아버지 윤봉길 의사'의 이름을 팔고 있다. 미안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또는 경력과 전문성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하기보다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인 윤봉길 의사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윤봉길 의사의 손녀가 아니었다 해도 박근혜 당선인이 그를 인수위에 고위 인사로 포함시켰을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지금 그에게 언론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친일파 후손 논란에 서 있는 박근혜 당선인을 돕고 있어 불편하지 않냐"고 묻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박근혜 당선인이 자신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 논란을 가리기 위해 순결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윤주경씨는 자신에게 맡겨진 '무언의 책임'을 다하려는 것인지 너무도 실망스러운 언행을 거듭하고 있다. 그는 노무현 참여정부가 친일파의 재산을 국가 귀속한 재원으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치욕스럽다'라고 표현하는 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1977년에 지원을 시작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대학 무상교육'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나는 이러한 그의 발언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사안을 두고 제각각 해석하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어떤 것은 비난하고 또 어떤 것은 옹호하기 위해 편파적으로 해석하여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1948년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제 해체된 반민특위를 뒤늦게나마 다시 시작한 것이 친일 재산조사위였다고 우리는 자부했다.
이 법을 제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힘들게 싸웠는지 그는 알고 있을까. 그런데 자신을 발탁해준 박근혜 당선인을 돕겠다는 취지로 이러한 성과마저 함부로 폄하하는 것을 보니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지만 너무 심각한 역사 인식의 허점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아 참담할 지경이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나만,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와 내 가족의 미래보다 조국을 선택했습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 윤봉길 의사 유서 가운데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에서 일제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는 같은 해, 상하이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경 일본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셨다. 당시 나이 25세였다. 윤주경씨는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1959년에 태어났다. 독립운동가의 육체적 DNA는 받았지만 그가 독립운동가의 정신적 DNA를 제대로 이어받았는지는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제대로 된 역할로 윤봉길 의사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