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관리하는 부서인 사복시가 있었던 사복시 터. 서울시 종로소방서 옆에 있다. 오른쪽에 교보빌딩이 보인다.
김종성
마의가 천한 직업으로 분류된 것은 승려·무당·수군 등이 천민처럼 취급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남들이 꺼리는 직종이라고 그렇게 분류됐던 것이다.
공자의 예법 사상을 담은 <예기>의 옥조 편에서는 "군자는 이유 없이 소를 죽이지 않고, 대부(大夫)는 이유 없이 양을 죽이지 않으며 사(士)는 이유 없이 개나 돼지를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사상의 영향 때문에 귀족들은 짐승 다루는 일을 기피했고,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의가 백정 같은 천한 직업으로 분류된 것이다.
하지만, 마의가 받은 대우는 백정이 받은 대우와는 차원이 달랐다. 성종 3년 5월 29일자(1472년 7월 5일) <성종실록>에 따르면, 마의는 화원(화가)과 함께 잡직으로 분류됐고 최고 종6품까지 승진이 보장됐다.
1472년 당시에는 종6품이 마의의 최고 품계였지만, 이 규정은 그 뒤에 개정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연산군 12년 1월 14일자(1506년 2월 6일) <연산군일기>에 주치형이란 마의가 정5품을 받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정5품은 오늘날의 중앙 행정기관 과장급이다.
이보다 233년 뒤의 일을 기록한 영조 15년 7월 13일자(1739년 8월 16일) <영조실록>를 보면, 중앙 행정기관인 이·호·예·병·형·공조의 요직이 마의 출신들에게 돌아간다고 개탄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정5품 이상으로 승진하는 마의도 적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한 직종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의 출신들이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물론 고위직에 오른 뒤에도 마의 출신들은 여전히 차가운 시선을 느껴야 했다. 마의가 고위직에 임명될 때마다 사대부 출신 관료들이 이런 인사 조치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의는 우리와 똑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것이 사대부들의 항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의의 승진을 차단할 수는 없었다. 말이 자동차나 비행기의 역할을 수행하던 시대에, 마의의 사기를 꺾으면 국가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국 곳곳을 연결하는 역참제도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격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국가는 선비 출신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에게 관직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마의가 다 관직을 받은 것은 아니다. 세종 9년 9월 22일자(1427년 10월 12일) <세종실록>에 따르면, 마의 중에는 양인도 있었고 노비도 있었다. 양인 출신의 마의는 관직을 받을 수 있었지만, 노비 출신은 그렇지 않았다.
한편 마의를 확보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위의 <세종실록>에 따르면, 마의 기술이 있는 죄인들을 국영 목장에 배치하는 일이 많았다. 마의를 확보할 목적으로 마의 출신 범죄자들을 감옥 대신 국영 목장에 보내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의는 관직 진출이 가능했지만, 선비들이 기피하는 직종이었다는 의미에서 천한 부류로 취급됐다. 마의는 절대로 법적 개념의 천민이 아니었다. 남들이 싫어하는 직종이란 의미에서 그렇게 불렸을 뿐이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그들 중에는 법적인 개념의 양인도 있었고 노비도 있었다.
그러므로 드라마 <마의>에서 마의 출신이라는 이유로 백광현에게 가해지는 시련과 차별은 마의의 실상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다. 사대부들이 마의를 폄하한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의들이 기분이 상해서 파업이라도 하는 날에는, 관료들의 발이 꽁꽁 묶이고 국가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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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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