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가 '일본유학'? 기겁하고 도망칠 일

국립고궁박물관 '덕혜옹주 탄생 100주년, 환국 50주년' 전시에 부쳐

등록 2013.01.10 12:08수정 2013.01.1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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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슬픈 귀국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강제로 끌려간 일본에서 귀국하는 덕혜옹주(동아일보 1929.6.3)
덕혜옹주 슬픈 귀국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강제로 끌려간 일본에서 귀국하는 덕혜옹주(동아일보 1929.6.3)동아일보

"귀인 양씨의 장례식은 예정대로 어제 5일 오전 9시에 계동자택에서 발인하였다. 덕혜옹주께서는 천담복(국상 때 입는 상복이 아니라 3년 상을 치룬 뒤 100일 간 입는 흰옷) 차림으로 눈물을 머금으시고 중문까지 영영 떠나가는 어머니의 유해를 전송하셨다."(<동아일보> 1929년 6월 6일)

어머니 장례식날 상복도 못 입고 이별해야 하는 옹주의 심정은 어땠을까? 귀인 양씨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어머니로 고종의 4명의 부인 중 한 명이다. 덕혜옹주는 아버지인 고종의 나이 환갑 때(1912년 5월 25일) 태어나 늦둥이로서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지냈지만, 1919년 그가 7살 때 아버지 고종이 승하하게 된다. 당시 이미 나라는 일본의 수하에 들어간 지 10년 가까이 될 무렵으로 조선총독부는 덕혜옹주 나이 13살 때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옹주를 일본땅에 강제로 보내게 된다. 옹주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 고종을 잃고 아버지처럼 따르던 순종은 덕혜옹주가 일본땅으로 강제 이주된 뒤 1년 만에 승하하게 된다. 이어서 3년이 지날 무렵,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 양 귀인이 돌아가시게 되는데 기사 머리에 인용한 기사는 당시 장례식 기사다. 여염집이라도 부모가 상을 당하면 상복을 입는 게 당연한 일이건만 일제는 자신들이 만든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이라는 규범에 어긋난다고 해 덕혜옹주에게 상복을 입히지 않고 천담복이라는, 여염집 여자가 탈상 뒤 입는 흰 치마저고리를 입게 했다.

지난 8일, 비운의 옹주로 알려진 덕혜옹주전(2012년 12월 11일부터 2013년 1월 27일)을 보러 국립고궁박물관에 다녀왔다. '덕혜옹주 탄생 100주년, 환국 50주년' 기념으로 열리고 있는 전시에는 옹주가 입었던 옷이랑 노리개·경대·화장품 등의 장신구와 옹주의 친필 엽서 등 평소 접해 보지 못한 물건들이 제법 많이 전시돼 있다. 이를 보러 오는 이들도 많았다.

덕혜옹주 족적 따라가다 발걸음 멈췄다

덕혜옹주전 국립고궁박물관의 "덕혜옹주전"의 소책자
덕혜옹주전국립고궁박물관의 "덕혜옹주전"의 소책자국립고궁박물관
전시관을 둘러보다가 '덕혜옹주의 일본유학'이라고 큼지막하게 써놓은 코너에서 나는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주최 측의 세심하지 못한 표현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일본유학'이라고 써두면 요즈음 유행인 '미국 유학'이나 '필리핀 유학'과 무엇이 다른가 싶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덕혜옹주는 유학생 자격으로 간 것이 아니다. 옹주의 일본행은 강제 이주며 볼모로 잡혀 간 것이었다. 그럼에도 주최 측은 무슨 생각으로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 생활'이라고 버젓이 써둔 것일까.


기왕에 말이 났으니 '유학'이란 단어를 좀 살펴보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유학'(留學)은 '외국에 머물면서 공부함'이라고 돼 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일본국어사전 <大辞泉>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부터 사용됐던 유학(留學)이란 말과는 쓰임새가 다르다.

먼저 태종실록 32권, 16년(1416) 10월 11일 치 기록을 살펴보자.


"빈객(賓客) 변계량(卞季良) 등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강무(講武)에 세자를 데리고 가고자 하는데, 세자가 '남아서 학문하기'를 청하니, 어찌할까?'"(召賓客卞季良等曰: 予欲於講武, 率世子以行, 世子請'留學'問, 如何?)

여기서 '유학'(留學)은 남아서 학문 하는 것이지 외국에 머물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후 일제의 검은 마수가 점점 좁혀옴에 따라 종래에 쓰이던 '유학'이란 말이 변질돼 일본에 보내는 것, 곧 '일본유학'이라는 말이 왕조실록에 새겨지게 된다. 특히 고종 때 29번, 순종 때 8번은 거의 일본유학과 관련된 말이며 덕혜옹주가 강제로 끌려가는 것도 '유학'으로 포장돼 있다.

"덕혜 옹주(德惠翁主)에게 토쿄(東京)에서 유학하도록 명하였다."[순부 16권, 18년(1925 을축·일 대정 14년) 3월 24일(양력) 1번째 기록]

13살 어린 소녀가 무엇을 배우겠다고 '일본유학'을 꿈꾸겠는가. 더군다나 환갑 나이에 얻은 보배 같은 딸 덕혜옹주의 성장을 보지 못한 고종이 독살로 세상을 뜬 뒤 순종을 아버지로 여기며 의지했는데, 그런 순종이 덕혜옹주를 떼놓고 싶었을까. 그런데도 순종은 덕혜옹주에게 일본으로 유학하라고 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집요하게 추진된 '유학'

조선인의 '일본유학'은 1910년 한일병합 이전부터 집요하게 추진됐다. 고종실록 32권, 31년(1894) 10월 23일 치 기록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른바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조선 개혁안 20개 조항>에 보면 '일본유학'이라는 말이 나온다.

"1. 정권(政權)은 모두 한곳에서 나오게 하여야 한다. 11. 경찰권은 한곳에서 행사하여야 한다. 17.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의 기구와 권한을 개정하여야 한다. 19.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여야 한다."

눈이 유난히 크고 깜찍한 모습의 덕혜옹주는 누가 봐도 사랑받을 만큼 귀여운 용모를 지녔다. 전시장에 진열된 어렸을 때 입었던 앙증맞은 치마저고리하며 커서 입었던 노랑 저고리와 빨간 다홍치마·삼작 노리개 등은 옹주가 사랑하던 조선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했으면 정신병에 걸렸을까. 전시장을 찾는 이들은 한결같이 비운의 옹주를 그리며 꼼꼼히 진열된 전시품을 둘러봤는데, 안타까운 것은 전시품 상당수가 일본문화학원 복식박물관과 일본 규슈국립박물관 소장품이었다는 점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고, 황실 내 계속되는 독살을 당하고 황손들이 일본으로 강제 이주되는 등 우리는 숨가쁜 시대를 살아왔다. 덕혜옹주 탄생 100년 전시회를 이제라도 마련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지만, 전시장 안에 '덕혜옹주 일본유학 생활'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으니 전시회가 끝나기 전이라도 고쳐놓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옹주가 전시관을 둘러본다면 기겁하고 도망칠 일이다. 볼모로 잡혀간 시대의 시각으로 전시관을 꾸미지 못하고 '미국유학' 하듯 꾸며 놓는 것은 본질을 잃고 껍질만 전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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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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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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