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지난해 12월 18일 오후 부산 동구 부산역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유세에서 지지자들이 박정희, 육영수 사진을 들어보이며 박 후보를 응원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내가 <진보세대가 지배한다>라는 책을 발간한 것이 2011년 10월 4일이었다. 최종원고를 후마니타스 출판사에 넘겼을 9월 중순에는 '안철수 현상'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책에서 향후 한국정치에서 세대구도가 전면화 될 것이며, 진보적 성향을 보이는 2040세대가 한국정치의 주류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나는 그 책에서 '2040세대'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사용했고, 2040세대 동맹전략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나는 그들 세대가 진보적인 이유를 '세대는 계급이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2040세대의 힘이 현실로 나타났고, 내가 제시한 2040세대 동맹전략은 야권의 핵심 전략이 되었다. 나는 잊혔지만 '2040세대'라는 용어와 세대동맹전략은 남았다.
대선 이후 다시 '세대'가 화두다. 대선에서 다시 뚜렷한 세대구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쟁점의 방향이 다르다. 야권이 졌기 때문이다. 5060세대의 힘으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번 대선은 내가 전망한 '진보세대가 지배한다'가 아니라 '보수세대가 지배한다'로 나타났다.
대선 이후 세대구도와 관련하여 주로 제기되는 주장은 두 가지다. 첫째는 고령화에 따른 유권자구도의 변화로 인해 향후에는 진보의 집권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2030세대보다 5060세대의 유권자수가 더 많았고, 앞으로는 고령화로 인해 그 추세가 더 심화될 것이므로 다시는 진보의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리해서 표현하면 '고령화로 인한 진보집권 불가능론'이다.
둘째는 '50대 보수화론'이다. 이번 대선 결과를 보면 50대가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고, 또 보수화되었는데, 문재인 후보가 너무 진보적으로 가서 이들 50대를 잡지 못했고, 그것이 선거를 진 이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령화를 인한 진보집권 불가능론'이나 '50대 보수화론'이나 모두 1편 글에서 살펴본 '진보필패, 중도필승론'의 논리적 기반이 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너무 진보적이어서 패배한 만큼 앞으로 야권은 중도 내지 보수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안철수 정당, 중도보수 정당의 창당을 주장하는 최태욱 교수는 그 이유로 '고령화를 인한 진보집권 불가능론'을 든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이번 대선에서 나타난 세대별 투표성향을 두고 "앞으로 진보는 결코 집권할 수 없다"고 결론내릴 수 있는가? "이제 진보의 시대는 끝났으니 중도보수로 나아가자"고 결론내릴 수 있는가?
'진보집권 불가능론'... 세대변수와 연령변수 함께 봐야먼저 '고령화로 인한 진보집권 불가능론', 즉 고령화로 인해 2030세대는 줄어들고, 5060세대는 늘어나서 정치지형이 보수화된다는 논리에 대해 살펴보자.
만일 이 주장이 전적으로 맞는다면, 20대와 30대의 비중이 높았던 과거에는 한국 정치가 진보의 아성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러했던가? 오히려 지금까지 한국 정치는 보수가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역사였다. 민주정부 10년도 보수다수파 사회에서 진보소수파 정부였다. 반면, 이번 대선에서는 진보가 독자적으로 보수와 대등한 승부를 만들어냈다. 박근혜 후보조차 당색을 빨간색으로 바꾸고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대표적 진보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선거가 이번 대선이었다.
이처럼 한국사회는 점차 진보가 확대되고 있는데 반해, '고령화로 인한 진보집권 불가능론'은 거꾸로 한국사회가 갈수록 보수가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할까? 그것은 연령변수와 세대변수를 교묘하게 섞어서 쓰기 때문이다.
연령변수란 나이가 먹을수록 보수화 되는 경향을 뜻한다. 윈스턴 처칠이 말한 "20대에 진보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요, 40대에 보수가 아니면 뇌가 없는 것이다"라는 말이 연령변수를 잘 대변한다.
세대변수란 이와는 달리 특정 세대가 고유한 경험으로 인해 그 세대 특유의 정치문화가 유지되는 경향이다. 한 사람의 정치성향은 20~30대 경험에서 결정되어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케인스의 말이 세대변수를 잘 대변한다. 나폴레옹도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살았던 20대의 세상을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유럽의 68혁명 세대는 60대가 된 지금도 상대적으로 진보성향이 관찰된다. 미국에서도 뉴딜시기에 젊음을 보낸 세대의 사회참여가 이후 세대보다 눈에 띄게 높았다.
한국에서도 이런 세대가 있다. 바로 민주화세대인 40대다. 이들은 이번 대선에서도 문재인 후보 지지가 박근혜 후보 지지보다 11.5%p 높았다. 내가 <진보세대가 지배한다>라는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40대의 보수화가 이전 세대보다 천천히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세대의 정치성향을 살펴보려면, 연령변수와 세대변수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지금의 50대와 60대의 다수는 그들이 20대와 30대일 때 그렇게 진보적이지 않았다. 그들 세대가 젊음을 보낸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진보는 결코 대중적일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의 40대도, 30대도 점차 보수화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60대와 50대에 비해서는 덜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연령변수와 세대변수를 함께 살펴볼 때, 앞으로 한국정치는 영원히 보수가 지배할 수밖에 없다는 '고령화로 인한 진보집권 불가능론'은 분명히 과도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50대 보수화론'... 박근혜 당선시킨 힘은 60대 실버혁명다음은 '50대 보수화론'에 대해 살펴보자. 대선 이후 50대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출구조사에서 50대의 투표율이 90%로 조사되었음이 보도되자 언론은 앞 다투어 50대가 대선승부를 결정한 것으로 분석하며, 집중보도했다.
언론은 50대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이유로 문재인 후보의 50대를 위한 정책 부재와 과도한 진보 성향, 그리고 이정희 후보가 TV토론에서 박근혜 후보를 공격한 것의 부작용 등을 열거하고, 대책으로 민주당의 중도·보수정책 강화를 강조했다.
이번 대선과 2002년 대선의 세대별 투표성향(표 참조)을 분석해보면, 이번 대선의 2040세대 진보후보 지지와 5060세대의 보수후보 지지 성향이 2002년보다 심화되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특히 5060세대의 보수후보 지지성향이 심화되었다. 더구나 5060세대의 유권자비율은 2002년 29.3%에서 이번 대선에는 40%로 늘어났다.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킨 힘은 분명히 5060세대의 힘이었다.
그런데 50대와 60대 이상(이하 '60대'로 표시)을 나눠서 보면, 정작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킨 힘은 언론 분석을 독차지한 50대가 아니라 실제로는 60대였다.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이긴 표수가 50대에서 173만 표인데 반해 60대는 289만 표에 달했다. 문재인 후보가 20대에서 152만 표, 30대에서 194만 표, 40대에서 79만 표씩 이긴 것을 고려하면 60대에서의 289만 표 차이는 실로 결정적이다.(이 표수는 방송사 출구조사에 따른 것으로 실제와는 조금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이처럼 60대의 압도적인 박근혜 지지가 이번 대선의 승부를 갈랐다. 60대에서 72.3%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는 것은 호남 출신을 제외한 60대의 대부분은 박 후보를 지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이번 대선은 60대의 '실버혁명'이었다. 박근혜 후보의 60대 득표율 72.3%는 2007년 이명박 후보보다 13.5%p, 2002년 이회창 후보보다 8.8%p를 더 높은 것이다.
5060세대에서 나타난 '계급배반투표'이번 대선의 특징 중 하나는 서울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에서 문재인 후보가 43%를 득표하여 역대 최고 수준의 득표를 했다는 점이다. 또한 지난 총선과 비교해볼 때, 서울의 부자동네에서 문재인 후보가 선전하고, 서민동네에서 박근혜 후보가 선전했다는 특성도 나타났다. 이를 두고 언론은 서울지역이 전반적으로 보수화되면서 '계급투표'가 줄었고, 박근혜 후보의 서민층 공략이 먹혀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평가다. 원인은 박근혜 후보의 핵심지지층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박 후보 핵심지지층은 5060세대이고, 여기에는 저소득층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에 서울의 상위중산층에게 박근혜 후보는 덜 매력적인 것이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과는 다른 현상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이 강남3구를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의 상위중산층이었다면, 박근혜 후보의 핵심 지지층은 저소득층을 다수 포함한 5060세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5060세대, 특히 60대 이상에게 '계급배반투표'가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계급배반투표'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정당을 찍는 현상이다.
5060세대의 '계급배반투표' 경향은 계속되어 왔다. 지난해 5월 한국갤럽이 세대별, 연령별, 응답자의 주관적 생활수준별로 나눠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빈곤층이 보수적이다'라는 가설은 '가난한 노년층' 비율이 높아 나타나는 착시현상으로 분석되었다. 즉, 자신의 생활수준이 하 또는 중하라고 답한 응답자들도, 2040세대는 야권 후보 지지가 높았고, 5060세대는 박근혜 후보 지지가 높았다.(<내일신문> 2012년 6월 12일)
왜 60대와 50대는 박근혜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나? 그러면, 왜 60대와 50대는 압도적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을까? 도대체 어떤 힘이 이번 대선에서 실버혁명을 가능하게 했을까? 선거는 간절함이 큰 쪽이 이기는 법인데, 도대체 어떤 간절함이 60대와 50대로 하여금 압도적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게 만들었을까?
내가 들은 이야기는 그 간절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공기업에 다니고 있는 40대 초반의 A씨. 그는 선거 전날 고향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충청도에 거주하시는 60대의 어머니는 A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죽기 전 소원이 있다. 꼭 들어 달라. 내일 선거에서 꼭 박근혜를 찍어라."A씨는 어머니의 죽기 전 소원을 들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문재인 후보를 찍으라고 말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주변에서 이런 비슷한 얘기가 많았는데, 도대체 무엇이 이런 현상을 가능하게 했을까? 나는 그것이 '박근혜의 힘'에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서 5060세대와 영남, 보수라는 한국의 주류세력에게 거의 육친(肉親)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의 간절함을 동원해낼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보다 박근혜 후보는 지난 15년 동안 정치를 해오며 5060세대에게 나름의 신뢰와 안정감을 쌓았다. 박근혜 후보는 독재자의 딸이기는 하지만 국회 경험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YS와 DJ 다음으로 많고, 정당지도자 경력도 길다. 그 정도면 의회지도자 출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5060세대의 지지, 지도자가 시간을 가지고 신뢰를 쌓아야 가능반면, 야권의 후보는 어떠했나? 문재인 후보는 민주당 경선을 통해 뽑혔고, 따라서 가장 나은 후보로 판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5060세대에게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문재인 후보는 정치를 시작한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게다가 안철수 후보는 대선을 불과 3개월 앞두고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한국사의 역경을 온몸으로 겪으며 긴 세월을 살아온 60대와 50대에게 그렇게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의가 아닐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진보진영의 지도자가 나이가 들어 일정하게 보수화된 5060세대에게 지지를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정치적 실천을 통해 신뢰를 쌓는 일이다. 5060세대에게 지지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차기 지도자가 시간을 가지고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5060세대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고로 직선제 도입 이후의 모든 대선에서 대선후보로 먼저 선출된 후보가 결국 대통령에도 당선되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5060세대 저소득층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복지와 경제민주화와 같은 진보적인 민생정책이 필요하다. 민주진보의 정체성과도 같은 진보 정책을 포기하는 것은 5060세대의 지지를 가져오는데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것은 진보정책과 유권자구도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언론 분석처럼 한국사회가 보수가 압도하는 사회로 가지도 않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경합하는 정도의 시대정신과 유권자 구도는 앞으로도 유지될 것이다.
문제는 이번 대선도, 앞으로도 리더십이다. 민주당은 지금부터 지지자와 육친(肉親)적으로 결합된 지도자를 키워야 한다. 그렇게 해낸다면, 2040세대는 더욱 지지할 것이고, 5060세대도 좀 더 많은 분들이 지지할 것이다. 포르투나(fortuna, 자기 밖의 운명적 힘)에 의존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비르투(virtu, 자신의 의지와 능력)로써 현실의 어려움을 돌파해내는 리더십이 민주당에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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