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고드름
임해용
고요한 숲속길을 가다보니 지나치게 조용하다.
"형! 우리 길을 잘못 든 게 아닐까? 너무 조용해. 그리고 무슨 시멘트로 된 수로 밖에 없어.""아냐 길에 가마니 깔려 있잖아.""그거 가마니 아냐. 야자열매 껍질이야.""그래?""응. 친환경 소재라고 거 외 오름 탐방로에 이거 많이 깔려 있잖아."
눈을 밟은 발자국을 따라 우리는 무심히 걷는다. 녹색 잎사귀와는 어울리지 않은 새하얀 눈만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다. 호젓한 숲 길에 그저 가느다란 시멘트 수로만이 이정표인양 한 줄로 그어져 있다. 백설의 왕국 같은 숲을 한시간 가량 걸으니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벤치가 덩그렇게 놓여있다. 어디에도 둘레길 표시가 없다.
엉덩이 붙일 곳을 발견한 기념으로 우리는 막걸리 한 병을 꺼내 놓고 잠시 쉬어 간다. 꿀맛 같은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일어 섰지만 과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딴청 피우고 있는 눈 덮인 숲의 비협조적인 표정이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이 길 맞어 이거?""형 말대로 가마니가 계속 있잖아. 여러 명이 지나간 발자국도 있고..."내심 불안하긴 하지만 한라산 둘레길 입구라는 표지판과 거기서부터 줄곧 깔려있는 야자수가마니를 굳게 믿어야 한다고 되뇌이며 눈에 찍힌 등산화 자국을 따라간다. 가느다란 수로는 아마도 오래전 식수가 없을 때 계곡물을 받아 쓰던 길인가보다. 눈 덮인 숲속에 한 줄 수로만이 방향을 안내해 주고 있다고 믿는다.
지대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그와 비례해 눈이 시나브로 깊어진다. 등산화 밑창 높이에서 부서지던 눈은 어느새 발목까지 푹푹 빠진다.걷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눈에 찍힌 발자국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눈이 깊어서 앞사람 자국만 밟고 가서 그런걸까.
길을 잃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점점 현실화되는 기분이다. 잊어먹고 있었는데 야자수가마니도 어느새 없어져 버렸다. 거의 두시간을 걸어왔는데. 다행인 점은 기온이 높고 바람이 없어 전혀 춥지가 않다는 점이다. 춥기는 커녕 목덜미에 땀이 스멀거려 넥워머와 털모자는 베낭에 넣어버리고 방한점퍼도 벗어야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