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7년 12월 서울에서 '버마 민주화의 밤' 행사를 열었다. 4만 달러의 성금을 모아 아웅산 수치 여사와 버마 민주화를 위한 지원금으로 전달했다.
김대중평화센터
동병상련(同病相憐), 김대중과 아웅산 수치김대중 전 대통령의 버마 민주화, 아웅산 수치 지원활동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납치와 사형선고, 감옥생활, 연금, 망명 등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모진 고초를 당해야 했다. 자신이 받은 이런 고통의 체험은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한 지원으로 이어졌다. 동병상련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버마 군정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50년간의 독재, 1988년 이른바 '88항쟁'에서 3000여 명의 국민들이 살해되는 등 버마 군사독재는 아시아의 수치였다. 아웅산 수치는 반군정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저항운동의 중심이었다.
1990년 5월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야당인 버마 민족민주동맹(NLD)는 총선에서 80%가 넘는 의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지만 군사정권은 국회개원과 민정이양을 거부했다. 이를 전후로 아웅산 수치 여사는 3차례에 걸쳐 20년 가깝게 이른바 '가택연금'에 놓이게 된다. 수천의 양심수들이 감옥에 갇혔고,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태국, 유럽, 미국, 일본, 한국 등지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버마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다. 야당 시절이나 대통령 재임 중에도, 퇴임 후에도 버마 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쉬지 않고 계속된다.
1994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코스타리카의 아리아스 산체스 대통령과 함께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를 창설하는데, 이 단체는 버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한 지원이 목표였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는 지금의 '김대중평화센터'의 전신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단체를 통해 서울과 마닐라에서 '버마 세미나', '버마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등 국제적인 버마 민주화 캠페인의 선봉에 섰다.
국제사회에서 김대중은 '미스터 버마'1998년 대통령 취임 후에도 버마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관심은 계속된다. 국제적인 민주화 지원 활동에 참여하던 활동가들도 정부 일을 맡게 되면 정부 간 관계를 의식해 활동을 소홀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정부인사'를 지원한다는 버마의 '내정간섭' 비난을 무릅쓰고 아웅산 수치 여사를 도왔다. 당시 한국의 기업들이 여럿 버마에 진출해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다.
1999년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렸다. 김 대통령은 일정에도 없던 버마와 정상회담을 요청해 버마의 군정 지도자 탄 쉐(Than Shwe) 총리를 만나 말했다.
"미얀마(버마) 정부가 아웅산 수치 여사와 대화하고 모든 정치세력을 정치에 참여시켜 안정된 정국을 이루어 세계의 지지를 얻을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탄 쉐 장군은 완고했다. 그들의 생각은 우리 군사독재 시절 사람들과 똑같았다.
"우리 국민들은 버마 군사정부를 확실히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수치 여사는 우리 정부가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군사정부는 우리가 마지막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이밖에도 김 전 대통령은 UN 총회를 비롯해 국제회의, 다자간 정상회의에서 세계 지도자들을 만나 버마 문제를 언급했다. 수치 여사가 감금되고 군정의 압박이 심해지면 성명을 발표하고 버마 정부를 규탄했다. 국제사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스터 버마'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버마에 대한 관심은 2009년 돌아가시던 해도 계속되었다. 2009년 5월 태국에서 망명 중인 버마 인사들이 서울 동교동 자택을 찾아왔다. 이때는 아웅산 수치 여사가 가택연금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는 문제로 국제사회가 버마를 규탄하고 있을 때였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 3차례의 독재를 극복한 한국의 민주화 경험을 설명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정의와 자유의 편에 있으며 옳은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역사에서 성공할 것이다"라고 격려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만남이 있은 후 4개월이 지나 돌아가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아웅산 수치 여사를 만나지 못했다. 이희호 여사는 수치 여사가 2010년 연말 가택 연금에서 해제되자 편지를 보냈다.
제 남편(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에 수치 여사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은 무척 안타깝습니다. 두 분이 만날 수 있었다면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리라 믿습니다.수치 여사가 답장을 보내왔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큰 사랑과 존경을 받은 분입니다. 이곳 미얀마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는 우리 모두는 김 대통령이 서거하셨을 때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대한민국의 최고 직위에 오른 뒤에도 야당 시절과 똑같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켜준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김 대통령의 고귀한 지지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