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개정교육과정에 따라 도입된 새로운 교육정책 중의 핵심은 단연 교과교실제였다. 교과교실제는 쉽게 말해 대학에서처럼 학생들이 각자 선택한 교과목에 맞는 교실을 찾아가 수업을 듣는 제도다. 지금은 아이들은 이동하지 않고 교사가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하는 방식이다.
교과부에서 제시하는 교과교실제 모형은 크게 세 가지다. 학교마다 다섯 과목 이상의 교과교실을 운영하는 '선진형', 최소 2개 과목만 운영하는 '과목중점형', 일부 교과에 한해 수준별 이동수업을 하는 '수준별 이동수업형' 등이 그것이다.
현재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에서도 2010년부터 3년째 교과교실제를 시범적으로 운영해 왔다. 첫 해인 2010년에는 1학년을 대상으로 국·영·수 세 교과에 적용하여 운영하였다. 두 번째 해인 2011년에는 1~2학년을 대상으로 역시 국·영·수 교과에서 운영되었다. 2012년에는 1학년 국·영·수와 2학년 영·수 과목에 한해 진행되었다.
최근 3년 간의 시범 운영은 '수준별 이동수업형'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런데 작년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2학년 국어 교과가 시범 운영에서 제외되고, 1학년 국어 교과의 수준별 분반이 통합형 분반(2+1에 따라 나뉜 반의 평균 성적이 비슷하게 하는 방식)으로 변경된 것이다. 성적 우열에 따른 수준별 분반 수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 국어 교과 선생님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교과교실제가 내년 2014년부터 전국의 모든 중고등학교에 전면적으로 도입된다. 이제 내년부터 각급 학교는 위에 소개한 교과부의 세 가지 모형 중 하나를 선택해 운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수준별 이동수업형 모형에서의 수준별 이동 수업이 우열반의 형태로 변질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실상 필자가 속해 있는 학교의 국어 교과에서 변동이 생긴 것도 이와 같은 우열반 편성에 따른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문제점은 과연 어떤 것들인가.
수준별 수업이 교육계의 일대 화두가 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3월 초등학교 1~2학년을 시작으로 도입된 제7차 교육과정에서부터였다. 제7차 교육과정은 처음부터 '수준별 교육과정'이라는 명칭을 따로 사용할 정도로 그 기조를 '수준별 과정'에 맞추고 있었다. 한 마디로 학생 개인의 수준에 맞게 다양성을 살리는 교육을 하자는 것이었다. 취지 자체는 하등 문제될 게 없다.
제7차 교육과정은 수준별 교육과정의 몇 가지 유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기도 했다. 그 첫 번째는 단계형이다. 학습 내용을 난이도에 따라 단계별로 구분하여 진행하는 유형이다. 이 방식은 수학이나 중등 영어와 같은 교과에 권장된다. 단계별 유형에서 차상급 단계 진급을 위한 자격 기준은 일반적으로 학교 자체적으로 설정한다. 그런 점에서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크다.
두 번째는 심화 보충형이다. 여기에서는 학생의 능력에 따라 학습의 양과 폭을 조정한다. 대개 '심화 학습'과 '보충 학습'의 형태로 진행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심화'와 '보충'을 가르는 성취 기준이 과연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유형은 평가와 관련된 측면에서도 문제가 많다. 가령 동일한 단원을 이수한 아이들이 자신의 수준에 맞게 고배점, 또는 저배점 문항을 골라 시험을 치르는 것이 과연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심화 보충형은 제7차 교육과정의 국민공통기본교과 중 국어·사회·과학·초등영어 등에 주로 적용된다.
마지막으로 과목선택형이 있다. 여기에는 학생의 능력과 관심 등을 반영하여 다양한 과목을 개설한 후 각자의 진로나 능력 수준에 맞는 과목을 선택해 자신의 교육과정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취지가 깔려 있다. 현재 고등학교 2~3학년에 해당하는 11~12학년의 선택 과정 단계에 이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학교급별 교사 현황이 천차만별이어서 무늬만 선택 과정으로 운용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국가교육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수준별 교육과정은, 꼼꼼히 살펴보면 이렇게 전체 교육과정의 편성이나 학습 진행 방식과 관련한 내용을 적시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수준별로 나눈 후 이들을 각기 다른 반에 집어넣어 수업하라는 식의 지침이 절대 아니다. 한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얼마든지 수준별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 학교 현장에서의 수준별 교육과정은 천편일률적이다. 거의 모든 학교가 수준별 분반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그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아이들 각자의 성적을 기준으로 우등반과 열등반으로 나누는 것이다. 비교육적이라는 이유로 비교적 은밀하게(?) 진행되던 우열반 편성 수업은 이제 대놓고 하는 당연한 방식이 되었다. 특히 교과교실제가 현장에 도입된 최근 3~4년 사이에는 더욱 노골화하고 있다.
물론 국가가 대놓고 이와 같은 수준별 분반 수업을 유도한 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비교육적일뿐더러, 수많은 현장 교사들의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절대로 의도한 만큼의 효과, 곧 전체적인 학력 향상의 성과를 얻기가 힘든 방식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생들 간의 위화감 조성과 열등반 아이들의 자존감 훼손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폐해가 훨씬 더 크다. '수준' 자체를 어떻게 규정하여 나누고, 상·중·하나 심화·보충 등의 수준을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할 것인지 등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찬성론자들은 7차교육과정 상의 수준별 교육과정이 결코 그와 같은 우열반 편성 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말만 되뇔 뿐이었다. 그들은, 제도가 현장에 내려오면 분명히 우열 분반의 방식으로 운용될 것이라는 교육운동 단체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현실은 결국 그렇게 귀결되고 말았다. 실상 수준별 교육과정의 '수준'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달리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국가교육과정의 입안자들이 내세운 그 거창하고 멋진 구호와 철학들을 모두 소화해 내기에 대한민국의 학교는 너무나 바쁘고 어지러운 곳이다!
우열반으로 수준을 나누어 진행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지난 2010년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백병부 선생(당시 경희중 교사, 현재 숭실대학교 교수)이 제출한 '학습부진 학생에 대한 수준별 하반 편성 및 특별보충수업의 교육적 효과'라는 제목의 논문이 그것이다. 그간 말로만 무성하던, 수준별 상하 분반 수업의 역효과가 이 논문을 통해 백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논문의 핵심을 쉽게 말하면, 교사가 학생의 학력 수준에 맞춰 알아듣기 쉽게 수업을 하자 성적이 더 낮아졌다는 것이다. 백 선생은 이를 실증하기 위해 중2 때 학업성취도가 하위 20%에 속한 학생들(표본수 6172명)의 1년 뒤 성적 향상도를 추적 조사했다. 그 결과, 하반에 속해 수준별 이동 수업을 받은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영어는 4점, 수학은 7점이나 낮게 나왔다. 하위권 학생들을 위한 특별보충수업이 오히려 성적을 떨어뜨린다는 분석도 나왔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놀랍지만 당연한' 결과가 나왔을까. 수업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여러 가지 요인의 통제와 영향을 받는다. 교사와 학교 요인, 가정의 경제적 상황과 부모의 학력, 지역 사회의 분위기와 사회 문화적인 상황, 기타 국가의 교육 철학이나 교과서, 학습 교재 등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학습자 요인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학습자, 곧 아이들의 자존감이나 자기 효능감은 절대적이다. 자기 효능감은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것이 높으면 아이들은 높은 자신감으로 무장되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공부를 할 때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중요한 까닭이다.
하지만 열등반(학교 현장에서 우열반 편성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당연히 '하반'이니 '열반'이니 하는 말은 쓰지 않고 'C반'이나 '노력반'과 같은 하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에 들어간 아이들은 이 자존감과 자기 효능감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수업을 하기도 전에 그나마 있던 자존감과 '난 할 수 있어' 의식을 떨쳐버리고 가는 것이다. 단언컨대 한번 패배자 의식에 젖어든 아이들은 학습 열의를 회복하는 데 아주 큰 어려움을 겪는다.
교사가 아이들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평정하여 이에 맞게 수업을 진행한다면 달리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점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가질 수 있는) 학교와 교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설령 관심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수준별 수업의 체제를 완벽하게 짜는 일이 가능할까.
그러니 기껏 우열반을 나누어 죽자사자 성적을 올리는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장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도입되는 제도에 진정한 교육적 의미를 부여하며 적극적으로 부응할 학교나 교사는 거의 없다. 예산을 따내려는 학교나 승진과 포상에 관심이 있는 교사들을 뺀다면 말이다.
간혹 학교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이야기되는 학교들이 있다. 교육 당국이나 언론이 '우수 시범 학교'라는 이름으로 홍보하기도 하는 사례들이 그것이다. 시범 학교 제도 자체는 다양한 교육 정책을 교육 현장에 연착륙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없지 않다. 문제는 이들 시범 학교의 사례를 성급하게 현장에 확산시키려는 데 있다. 학교와 지역마다 다른 여건을 무시하고 우수 시범 학교의 사례를 각 학교에 반강제적으로 유포시키려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나는 학교가 아이들을 우열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실시하고 교육적으로 진정 의미 있는 성과를 내는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나도 아닌) 수많은 우수 시범 학교의 사례들은 '우리는 가능했어요'라고 말한다. 그것이 정말 '가능'했다면 세계 교육학의 역사는 새로 쓰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와 같은 우열반 편성 방식이 교육적으로 진정 의미가 있다면 왜 교육 선진국에서 이를 채택하지 않을까.
수준별 우열반 수업을 강조하는 이들은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를 중시한다. 한 마디로 아이들 수준에 맞는 차등화한 수업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여 아이들의 성적을 높이자는 것이다. 성적을 높이는 게 학교 교육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그것을 결코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험 성적과 점수로 결정되는 대학 입시나 고등학교 입시 등이 옥죄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열반 편성을 통해 성적을 높이자고 주장하는 이들의 '순수한'(?) 의도를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교육이 다만 그런 것이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녕 그런 '순수한' 의도만으로 아이들이 책상에 붙어 앉아 성적을 높이고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밤을 새어가면서라도 학교에 붙어 있겠다.
그러나 교육은 그렇게 되는 게 아니지 않는가. 그런 것이 교육이 아니지 않는가. 짧은 기간에 강압적이고 집중적으로 공부를 시켜 성적을 높이는 것이 당장은 달디 단 사탕이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 과정에서 공부과 학교에 대해, 나아가 자신의 삶과 이 사회에 대해 과연 정말 진지한 태도를 갖출 수 있을까. 우리는 공부'도'가 아니라 공부'만' 해서 우리 사회에 나온 '괴물들'의 폐해를 지금까지 너무 많이 봐오지 않았는가.
아이들의 성적이나 학업 태도는 우열반 따위를 통해서는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들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이는 열등반의 아이들이나 우등반의 아이들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나는 최근 3~4년 간 우등반과 열등반을 모두 맡아봤지만, 우열반 편성에 진정으로 우호적인 아이들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우등반 아이들은 우등반 아이들대로 더욱 과도한 경쟁 심리에 빠져들기가 쉽다.
최근 아이들의 학습이나 학업 성취도는 오히려 가족의 경제적인 배경이나 부모 학력과 같은 교육 외적 요소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작년(2012년) 3월, 숭실대 백병부 교수팀이 발표한 서울시교육청 정책연구보고서*에 그 적나라한 사실이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초등학교 학습부진 학생은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부모가 각각 57.3%(부), 65.8%(모) 등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학습부진 중학생 역시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부모가 각각 49.7%(부), 64.3%(모) 등으로 가장 높았다.
학습 부진 학생들은 가족의 경제 소득도 낮았다. 월평균 총 가구 소득은 200만 원 이상 400만 원 미만이 전체 학습 부진 학생의 41%로 그 비중이 가장 높았다. 200만 원 미만 역시 39.1%를 기록해 경제적인 어려움이 학습 부진과 일정한 상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 준다. 부모가 아이 공부를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시스템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의 학력이나 가족의 경제적인 배경은 그렇다 치자. 학교에서 이를 어찌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수준별 상하 분반 수업은, 그 한계와 문제가 명백한 이상 학교에서 개선하여 실시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많은 학교에서는 여전히 교과교실제라는 이름으로 수준별 분반 수업을 더욱 확대하여 진행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이것이 전국 학교에서 아예 전면화한다.
교과교실제에서의 수업은 각 교과별 전담 교실에서 진행된다. 교실 확보 등의 인프라 구축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현재 교과교실제 시행 시범 학교로 선정되면 2~3년의 기간에 연간 2~3억 원의 재원이 학교에 추가로 지원된다. 학교는 이 돈으로 모자라는 교실과 기타 시설, 강사 및 기간제 교원 등을 충당할 수 있다.
교과교실제에서 반을 재구성하는 데 활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2+1'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에서는 한 학년의 2개 반을 한 단위로 묶은 후 이를 3개 반으로 나누는 방식을 쓴다. '2+1'은, 원래의 2개 반에서 1개 반이 추가되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문제는 그렇게 세 개 반으로 나눌 때의 기준이다. 익히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대다수 학교는 성적을 기준으로 나눈다. 예컨대 각각 35명 정원인 2개 반을 묶어 15명, 35명, 20명으로 성적에 따라 분류한 후 상반, 중반, 하반으로 편성하는 것이다. 70명을 성적에 따라 고루 섞어 25명씩 3개 반으로 나눌 수 있는데도 굳이 이렇게 한다.
과연 그 이유가 뭘까. 무엇보다 학부모들에게 내세울 수 있다. '우리 학교는 이렇게 학생들의 학업 신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딱 좋은 것이다. 현장 교사들의 반대나 아이들이 갖는 심리적인 폐해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수준별 분반 수업에 관한 실증적인 연구를 제시해도 못 본 체한다. 심지어 박사논문이면 다냐는 투도 있다(물론 박사논문이 항상 만능일 수는 없다).
이 수준별 수업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애초 국가가 제안한 수준별 교육과정이 개인의 다양성과 선택권을 존중하자는 취지에서 나왔음은 앞에서 지적한 바 그대로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유형을 제안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해석과 수용은 천편일률이었다. 성적에 따른 분반, 곧 우열반 편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이와 같은 획일적인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준별의 '수준'에 대한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수준을 반드시 성적에 따라 맞춰야 하는 법은 없다. 성적 수준에 따라 반을 나누는 것 또한 절대로 강제 사항이 아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상반의 꼴찌인 15등과 중반의 1등인 16등을 서로 다른 반으로 나눌 권한이 있는가. 중반의 꼴찌인 50등과 하반의 1등인 51등을 서로 다른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교육적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보기에 적어도 현재로서는 성적이 아이들의 수준을 나누는 근거가 되어야 할 그 어떤 정당한 이유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성적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굳이 또다시 대꾸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래도 꼭 나누어야 한다면 '뺑뺑이'를 돌리면 된다. 반을 나누더라도 성적에 따라서 상 ․ 중 ․ 하로 나누기보다 각 반의 성적 분포가 골고루 될 수 있도록 잘 하는 아이들과 못 하는 아이들을 지그재그 방식으로 배치시키는 것이다. 정원이 똑같이 35명인 2개 반을 '2+1' 방식에 따라 '가·나·다'의 세 개 반으로 나누는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곧 가~다반에 순서대로 (70명 중) 각각 1~3등을 배치하고, 거꾸로 다~가반의 순서로 각각 4~6등을 집어넣는 식이다. 이렇게 지그재그 방식으로 아이들을 세 개 반에 배치하면 반별 전체 성적 평균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분반하면 3개 반의 정원이 35명에서 25명 정도로 줄어들게 되는 효과가 있다. 교사가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대상으로 수준에 맞는 개별화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조건에 어느 정도 근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15명, 35명, 20명이나 20명, 30명, 20명 등으로 나뉘는 상·중·하반 체제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특히 35명이나 30명 정원으로 되어 있는 기존 중반에서의 수업은 개별화 수업을 하기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학생 수가 대폭 줄어든 교실에서 교사는 그 다양한 수준의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골고루 시선을 줘야 한다. 아이들을 성적과 공부로 차별하지 말고 동등하게 대우해줘야 한다. 백 번 양보해 차등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면, 공부를 잘하는 아이보다 못하는 아이에게 더 많은 시선과 관심이 가야 한다. 그것이 교육적으로 정당하고 윤리적으로 올바르다. 잘하는 아이들은 이미 넘칠 만큼 충분한 배려와 관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할 때 한 반에 골고루 섞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정한 의미의 수준별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여기에 교육당국이 조금만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면 금상첨화다. 교원 법정정원 수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교사가 아이들 각자에게 골고루, 더 많이 시선을 주고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교사 1인당 학생 수, 특히 학급당 학생 수를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광역시 등 대도시 지역은 학급당 정원이 30~40명에 이르는 곳이 부지기수다. 콩나물 교실이 여전히 많은 것이다.
하지만 2012년 현재 중등학교를 기준으로 한 교원 법정정원 확보율은 78.9%에 불과하다. 더 심각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정부 때 84%,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 82%였던 교원 법정정원 비율이 MB 정부에 이르러 70%대까지 추락할 정도로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육 당국은 이렇게 법으로 정한 정원 비율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학령 인구 감소에 따라 학생 수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기 시작하는 2020년 경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야말로 대책 아닌 대책을 고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교원 법정 배치 기준을 규정하고 있는 대통령령인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2012년 10월 23일)함으로써 교원 법정정원을 폐지하려는 꼼수를 두고 있다. 대통령령인 기존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의 관련 규정을 삭제하는 대신 교과부장관령인 '국가공무원의 정원에 관한 규정'에 교원 정원 기준을 '학급당 교원 수'에서 '학생수 당 교원 수'로 변경하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재정 문제 등을 고려해서 보더라도 이 정도면 편법의 정도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수준별 수업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개별화 수업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사가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충분히 소통하고, 그들에게 고루 관심과 시선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한 반 당 학생 수가 적정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학교 현실 속에서는 교사가 모든 아이를 일일이 챙기는 일이 힘들거나 불가능하다. 교사 충원을 통한 교원 법정 정원 확보가 시급한 까닭이다.
수준별 수업의 정신은 모든 아이가 자신의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아이들 각각의 개인차를 반영한 개별화 교육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한 반 당 아이들의 숫자가 20명을 넘지 않게 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 이하로 줄이는 것도 좋다. 그렇게 '여유 있는' 공간에서 교사와 아이들은 '함께'와 '같이'에 기반한 협력적인 공동체 교육을 펼쳐나갈 수 있다. 교육당국의 획기적인 의식 변화와 행 ․ 재정적인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까닭이다.
* 조사 기간: 2011년 9~10월, 조사 대상: 서울지역 초등학교 550개교, 전담 강사 471명, 학생 및 학부모 5588명 / 중학교 33개교, 전담강사 31명, 학생 및 학부모 632명(<프레시안> 2012년 3월 14일 자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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