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들부들 떨며 그대 이름 불렀습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⑥] 시인 이용임

등록 2013.02.14 16:35수정 2013.02.14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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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의 두뇌를 20년간 멈추어야 한다"는 유명한 판결문과 함께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이 유명한 경구는 로맹 롤랑의 글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그람시가 요약한 것입니다.

제주도 강정마을의 600명이 넘는 주민, 평화활동가들에 대한 연행, 구속, 투옥, 벌금 사태 뒤에는 불법 공사 상황이 있습니다. 주민 협의를 거치지 않은 강제 과정, 전쟁을 도발하는 안보 기지, 민군복합항이 입증되지 않은 설계도, 환경문제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공사, 인권 유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불법 요인에 대해 제주 도지사를 중심으로 제주 주요 언론은 입을 다물거나 사실을 왜곡해 왔습니다.

제주해군기지는 미 해군 설계요구에 의해 미군 핵 항모가 입항할 규모로 설계되고 있다는 사실을 2012년 9월, 장하나 국회의원이 밝혀냈습니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시인과 작가들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후 대정, 세화 성산에 공군기지가, 산방산에 해병대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으며 제주도가 최전선화되는 것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대한민국 곳곳의 요지를 미군에게 내어준 형편임에도, 비무장 평화의 섬 한 곳 확보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조국은 무력한 나라인가에 대해 다만 슬퍼합니다.

군함에 의해 오염될 서귀포 바다와 기지촌으로 전락할 제주도의 고운 마을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제주도민을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 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그대 나의 구럼비


 그대는 나의 구럼비, 잊어도 잊히지 않고 끊어도 끊이지 않을 약속
그대는 나의 구럼비, 잊어도 잊히지 않고 끊어도 끊이지 않을 약속노순택

이건 먼 옛날에 맺었던 약속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대여. 푸른 이랑 속 큰 늑대의 몸을 열고 그 꽃을 꺾었던 그 날을 기억하십니까. 살점과 핏줄을 모두 거두고도 생생불식 향을 내뿜던 검은 꽃. 바다에 내려놓자마자 커다란 뿌리를 내리고 곧장 말라붙어버렸지만 파도가 꽃잎을 적실 때마다 피비린내같은 향기를 흘려보내던. 그 불길함에 나는 그대 뒤로 숨었지만 그대 은빛 손으로 인자하게 내 머리를 쓰담으며 이리 말씀하셨지요. 저것이 생명, 죽여도 죽여도 스러지지 않는 생명의 원천. 우주의 모든 빛을 그러모아 저리 검은 색. 전생과 이생과 후생의 모든 목숨이 영혼을 담금질하는 자궁. 아가, 나의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에게 언약을 주마. 절대 죽지 않는 생명을 여기 내려놓아 수수천만년의 내 사랑을 증명하마. 그러니 너도 잊지 마라, 이 날 이 시간 이 땅과 바다와 하늘의 모든 색으로 우리가 맺은 매듭을. 끊어도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고리를. 잊어도 잊어도 악몽처럼 되살아오는 사랑을.

무서워요. 나는 입술을 떨었습니다. 그대 그 형형한 늑대의 눈으로 나를 보며 불길처럼 말씀하셨지요. 너와 나를 빚은 시간과 공간의 자궁에 맹세하노니 이 맺음은 신도 인간도 끊을 수 없다. 그리 강렬하고 무서운 숙명이다. 그대는 손톱을 들어 내 가슴에 글자 몇을 새겨놓았지요.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네가 나를 잊어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의 원천, 내가 너의 생명, 네 영혼은 몇 생을 거푸 태어나도 내게 담금질하여 태어나리라. 여기 내가 심장을 내려놓나니. 이 말라붙은 꽃잎 위에서 날 기억하라.

네, 사랑은 정언입니다, 그대여. 그대는 털썩 내 발치에 쓰러져 은빛 발톱과 손톱을 오므리고 천천히 푸른 피를 흘렸지요. 내가 서 있던 조그만 땅이 들어올려지며 순식간에 사방으로 파도가 몰아쳤습니다. 그대의 온몸이 세계가 되었지요. 그대가 내게 건넨 한 줄의 언약 위에 나는 부들부들 떨며 그대 이름을 불렀습니다. 구, 럼, 비. 오, 나의 자궁.

그대의 핏방울을 마시고 배가 불렀고 형형한 별빛 아래 바위 위에서 나는 몸을 풀었습니다. 아이들이, 수많은 아이들이 땅에 흘러넘쳤고, 그대의 푸른 살점을 건너 또다른 곳으로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내 몸에 실렸던 심장들이 도곤도곤 뛰는 소리를 들으며 까무라치고, 까무라치며 몇 생을 머리터럭 색깔을 바꾸며 사는 동안, 그 생들을 꺼내 꼭 그대에게 담금질해 보냈지요. 아이들의 뼈마디 어딘가 새겨져 있는 저주와도 같은 사랑의 이름, 세계와 맺은 매듭, 구.럼.비.

그대여, 그대는 이 날을 멀리 내다보았길래, 그토록 처절한 불길로 나를 태우며 맹세를 시키셨던 건가요. 생과 생을 이어가던 그대의 심장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대의 핏방울을 이은, 내가 배냇피를 그대에게 헹구었던 아이들이, 무서운 쇳덩이를 들고와 내리꽂는 것을. 그때마다 아이들이 점점 까맣게 시들어가는 것을. 금빛 글자로 새겨놓은 그대 이름 때문에 전율하는 것을. 생명과 생명이 맺은 매듭은 신도 인간도 풀지 못하는 법. 세계와 세계가 낳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 그대 이름이 증거, 그대 이름이 언약. 내가 새겨놓았지요. 그 아이들의 뼈마디 어딘가에. 구.럼.비. 절대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이름.

그 아이들은 아직 모릅니다. 그것이 부서졌음에도 맹렬히, 태고의 밤향기를 흘리며 불길하게, 원초의 생명력으로 꿈틀거리고 있음을. 그대가 흘렸던 푸른 피들이 높이 몸을 일으켜 옛 맹세를 잊혀진 언어로 부르짖고 있음을. 어두운 여름밤에 폭풍을 불러일으키고 나뭇가지마다 까마귀 날개로 바람을 만들어 생명을 호출하고 있음을. 그 매듭은 아무도 풀지 못함을. 아무리 부수고 부수어도 부서지지 않는 사랑임을, 아직 모릅니다, 그대와 나의 아이들은. 그대여,

모든 생명이 밤에 뿌리를 내려 그 심장에 연결된 살점과 핏줄임을. 위대한 자연의 어머니와의 링크를. 그러기에 밤이 오면 그 아이들의 가여운 영혼이 떨며 웁니다. 오오 나도 웁니다. 그대의 푸른 피에 잠겨서.

나는 할망, 검은 나무와 날개의 딸, 피를 머금어 생을 낳는 세세만년의 자궁입니다. 그대여, 그대는 심장, 발톱으로 먼지를 그러쥐어 땅을 만들고 피를 흘려 바다를 일구고 심장을 뽑아 세계와 신과 모든 뭇생명과의 매듭을 만들었던, 그대는 영혼, 그대는 나의 구럼비, 잊어도 잊히지 않고 끊어도 끊이지 않을 약속, 생명의 링크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용임 시인은 1976년 경남 마산 출생. 2007년 한국일보 시부문 당선. 시집 <안개주의보>.
#제주해군기지 #구럼비 #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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