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나의 구럼비, 잊어도 잊히지 않고 끊어도 끊이지 않을 약속
노순택
이건 먼 옛날에 맺었던 약속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대여. 푸른 이랑 속 큰 늑대의 몸을 열고 그 꽃을 꺾었던 그 날을 기억하십니까. 살점과 핏줄을 모두 거두고도 생생불식 향을 내뿜던 검은 꽃. 바다에 내려놓자마자 커다란 뿌리를 내리고 곧장 말라붙어버렸지만 파도가 꽃잎을 적실 때마다 피비린내같은 향기를 흘려보내던. 그 불길함에 나는 그대 뒤로 숨었지만 그대 은빛 손으로 인자하게 내 머리를 쓰담으며 이리 말씀하셨지요. 저것이 생명, 죽여도 죽여도 스러지지 않는 생명의 원천. 우주의 모든 빛을 그러모아 저리 검은 색. 전생과 이생과 후생의 모든 목숨이 영혼을 담금질하는 자궁. 아가, 나의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에게 언약을 주마. 절대 죽지 않는 생명을 여기 내려놓아 수수천만년의 내 사랑을 증명하마. 그러니 너도 잊지 마라, 이 날 이 시간 이 땅과 바다와 하늘의 모든 색으로 우리가 맺은 매듭을. 끊어도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고리를. 잊어도 잊어도 악몽처럼 되살아오는 사랑을.
무서워요. 나는 입술을 떨었습니다. 그대 그 형형한 늑대의 눈으로 나를 보며 불길처럼 말씀하셨지요. 너와 나를 빚은 시간과 공간의 자궁에 맹세하노니 이 맺음은 신도 인간도 끊을 수 없다. 그리 강렬하고 무서운 숙명이다. 그대는 손톱을 들어 내 가슴에 글자 몇을 새겨놓았지요.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네가 나를 잊어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의 원천, 내가 너의 생명, 네 영혼은 몇 생을 거푸 태어나도 내게 담금질하여 태어나리라. 여기 내가 심장을 내려놓나니. 이 말라붙은 꽃잎 위에서 날 기억하라.
네, 사랑은 정언입니다, 그대여. 그대는 털썩 내 발치에 쓰러져 은빛 발톱과 손톱을 오므리고 천천히 푸른 피를 흘렸지요. 내가 서 있던 조그만 땅이 들어올려지며 순식간에 사방으로 파도가 몰아쳤습니다. 그대의 온몸이 세계가 되었지요. 그대가 내게 건넨 한 줄의 언약 위에 나는 부들부들 떨며 그대 이름을 불렀습니다. 구, 럼, 비. 오, 나의 자궁.
그대의 핏방울을 마시고 배가 불렀고 형형한 별빛 아래 바위 위에서 나는 몸을 풀었습니다. 아이들이, 수많은 아이들이 땅에 흘러넘쳤고, 그대의 푸른 살점을 건너 또다른 곳으로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내 몸에 실렸던 심장들이 도곤도곤 뛰는 소리를 들으며 까무라치고, 까무라치며 몇 생을 머리터럭 색깔을 바꾸며 사는 동안, 그 생들을 꺼내 꼭 그대에게 담금질해 보냈지요. 아이들의 뼈마디 어딘가 새겨져 있는 저주와도 같은 사랑의 이름, 세계와 맺은 매듭, 구.럼.비.
그대여, 그대는 이 날을 멀리 내다보았길래, 그토록 처절한 불길로 나를 태우며 맹세를 시키셨던 건가요. 생과 생을 이어가던 그대의 심장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대의 핏방울을 이은, 내가 배냇피를 그대에게 헹구었던 아이들이, 무서운 쇳덩이를 들고와 내리꽂는 것을. 그때마다 아이들이 점점 까맣게 시들어가는 것을. 금빛 글자로 새겨놓은 그대 이름 때문에 전율하는 것을. 생명과 생명이 맺은 매듭은 신도 인간도 풀지 못하는 법. 세계와 세계가 낳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 그대 이름이 증거, 그대 이름이 언약. 내가 새겨놓았지요. 그 아이들의 뼈마디 어딘가에. 구.럼.비. 절대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이름.
그 아이들은 아직 모릅니다. 그것이 부서졌음에도 맹렬히, 태고의 밤향기를 흘리며 불길하게, 원초의 생명력으로 꿈틀거리고 있음을. 그대가 흘렸던 푸른 피들이 높이 몸을 일으켜 옛 맹세를 잊혀진 언어로 부르짖고 있음을. 어두운 여름밤에 폭풍을 불러일으키고 나뭇가지마다 까마귀 날개로 바람을 만들어 생명을 호출하고 있음을. 그 매듭은 아무도 풀지 못함을. 아무리 부수고 부수어도 부서지지 않는 사랑임을, 아직 모릅니다, 그대와 나의 아이들은. 그대여,
모든 생명이 밤에 뿌리를 내려 그 심장에 연결된 살점과 핏줄임을. 위대한 자연의 어머니와의 링크를. 그러기에 밤이 오면 그 아이들의 가여운 영혼이 떨며 웁니다. 오오 나도 웁니다. 그대의 푸른 피에 잠겨서.
나는 할망, 검은 나무와 날개의 딸, 피를 머금어 생을 낳는 세세만년의 자궁입니다. 그대여, 그대는 심장, 발톱으로 먼지를 그러쥐어 땅을 만들고 피를 흘려 바다를 일구고 심장을 뽑아 세계와 신과 모든 뭇생명과의 매듭을 만들었던, 그대는 영혼, 그대는 나의 구럼비, 잊어도 잊히지 않고 끊어도 끊이지 않을 약속, 생명의 링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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