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 선언_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느린걸음, 2010)
김진형
이 작은책은 김예슬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명문대 입학이란 관문을 통과한 직후, '진리는 학점에 팔아' 넘기고 '정의는 이익에 팔아' 넘긴채,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의 민낯을 만나며, '스펙에 매달리자니 젊음이 서럽고 다른 걸 하자니 뒤쳐질까 불안하고 또다시 반복되는 행복하지 않은 이 나날들'을 고통스럽게 보낸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대학, 그 대학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모든 인간다움을 멸시하는 탐욕을 '적'들로, '거짓 희망'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회 진보는 이러한 근원적인 가치투쟁에서 매일 매일 패배한 듯이 보였다. 그 결과가 '탐욕의 포퓰리즘'을 들고 나온 이명박 정부 집권으로 귀결된 것이리라. 내가 접해온 진보는 충분히 래디컬하지 못하기에 쓸데없이 과격하고, 위험하게 실용주의적이고, 민망하게 투박하고, 어이 없이 분열적이고, 놀랍도록 실적 경쟁에 매달린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실상 물질적이고 권력정치적이고 비생태적이고 엘리트적이고 남성중심적이고 삶의 내용물에서 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다."(71면)김예슬의 결기는 래디컬적 소망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연장선에서 만나는 다양한 현실적 층위의 실천들을 결행한다. 래디컬하다는 것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사유이며, 그 사유는 인간다움에 대한 오랜 갈망일 것이다. 진리는 그 근원과 다름 아니고, 정의는 그 실천적 삶을 잉태하는 파토스와 다름 아니다. 살아내지 못한 진리는, 더 이상 그 자격이 없다. 그리하여 김예슬은 대학이 아닌, 광장에 섰다.
내 한 줌 목숨보다 소중한 딸에게놀라운 결단이고 지체없는 실천이었지만, 대학을 거부하고 그만둔 그에게도 마음 한켠 걸리는 것이 있었다. 가난했지만 오직 자녀를 위해 헌신하였던, 모든 희망을 자신에게 걸었던 부모였다. 하여 그에겐 '명박산성'보다 넘기 힘든 것이 '부모산성'이었다고 고백한다. 부모는 졸업만 해달라고 매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부모를 넘어섰다. 그 힘든 마음을 이렇게 썼다. 부모를 위한 진심이었을 것이다.
"제발 자녀를 자유롭게 놓아 주십시오. 당신의 몸을 빌어 왔지만 그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신성하고 고유한 존재이지 당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아이를 위해 '좋은 부모'가 되려하지 말고 당신의 '좋은 삶'을 사십시오."(100면)나에게는 일곱 살 딸과 네 살된 아들이 있다. 자칫 자식은 나의 오랜 꿈을 위한 존재로 치환된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나의 자식이 이루길, 그리하여 가난한 나처럼 살지말고 세상을 다스리며 사는 자리에 거하길 바란다. 내가 그런 헛된 욕망으로 아이들을 '소유'하려 할 때, 김예슬의 충언은 값진 이정표가 된다. 하여 이 책의 면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 한 줌 목숨보다 소중한 딸 예지가 언젠가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김예슬은 다행히 분노에 치우쳐 삶을 만만히 보고 있지 않다. 앞서 나는 그의 치기 어린 열정이, 자칫 너무 큰 결정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고 하였다. 대학에 가서 김예슬을 소개할 때, 자칫 그들이 김예슬처럼 '무모한 결행'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난감하곤 했다. 그런데 다행히 김예슬은 무모한 로맨티스트가 아닐 뿐만 아니라, 몽상가는 더욱 아니었다.
그는 '가슴 뛰는 삶의 모델이 나에게는 아름답지 않다'고 일갈한다. 그 흔한 롤모델을 찾으려 하지도 않고, 롤모델에 의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또한 어떻게 꿈이 직업일 수 있느냐고 당돌히 묻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며 자신이 선택한, 자신이 가야할 길의 힘겨움을 정확히 예측한다. '대학 거부 선언을 하고 당당히 대학 문을 나섰지만, 고졸자 신분으로 돌아온 나 역시 막막하다'면서도 김예슬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생각할 틈도, 혼란을 겪을 틈도 없이 거짓 희망의 북소리에 맞춰 앞만 보고 진군하는 것이 훨씬 괴로운 것임을. 그리하여 지금 내가 혼란스러운 것은 '다른 길을 찾으라'는 고통스런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야 낫는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이 고통과 상처를 통해 분명 다른 희망의 길로 걸어갈 수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든다. 그렇기에 나는 젊음이라는 빛나는 무기 하나 믿고 위험한 길을 나서는 것이다. 거짓과 더불어 제 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친 듯이 사는 쪽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115면)진리를 너의 존재로, 정의를 너의 삶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