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의 진원지인 명덕로터리에 2.28기념탑어 서 있던 모습. 그러나 전두환 집권기인 1989년 11월 14일 이 탑은 철거되었고, 1990년 2월 시민들의 발길이 뜸한 곳에 다시 세워졌다. 그렇게 옮겨진 것은 민주주의 정신을 상징하는 이 탑이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군사정권에 대구지역 관료들이 아부한 결과로 여겨지고 있다. 사진은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의 <2.28민주운동기념사업50년>에 실려 있는 것이다.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대구 시민의 날'을 서울처럼 그렇게 정하려면 대구가 지금의 위상을 가지게 된 날을 기려야 한다. 그 날은 아마도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된 당일일 것이다. 그런데 고려 시대만 해도 대구현이 장산군(경상북도 경산시) 소속이었고, 군으로 승격되는 것도 1419년인 것을 보면 대구는 줄곧 평범한 농촌 군락이었다.
대구의 위상 |
경상감영이 1601년 설치된 이후 대구가 경상도 전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는 사례 중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교육이다. 대구와 부산의 국립대학교에 사범대학 및 사범대부속고등학교가 언제 설치되는가를 비교해 보면 부산보다 대구의 위상이 1970년대 초까지는 경상도에서 단연 우뚝했다는 사실을 가늠할 수 있다. 1946년 개교 당시 경북대학교에는 처음부터 사범대학이 있었다. 경북대는 사범대학 졸업생들의 교생 훈련 등을 위해 1951년 부속고등학교를 개교했다. 그에 비하면 부산대학교는 경북대에 비해 23년이나 뒤인 1969년에 가서야 비로소 사범대학을 신설했다. 그 동안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졸업생들이 부산과 경남 일원으로 발령을 받아 중등교육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산대학교는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도 경북대에 비해 21년 늦은 1972년에야 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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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된 때는 1601년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군'에 불과했던 대구는 1601년에 이르러 사방의 경산, 하양, 화원 등지를 모두 포괄하게 되면서 대구부로 승격하였고,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명실상부하게 경상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경상감영이 설치된 날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경상감영 설치일을 대구 시민의 날로 정할 수는 없다. 날짜가 확인되면 서울처럼 그날을 시민의 날로 삼으면 타당하겠지만, 근거도 없이 임의로 추정할 일도 아니다.
'달구벌'이 '대구'로 바뀐 날짜도 알 수가 없다.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의 일이니 알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大丘'가 '大邱'로 바뀐 날짜를 시민의 날이라 하다가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 역시 정조 초기의 일로만 여겨질 뿐 분명한 날짜가 있는 것도 아니다.
2월 28일 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2월 28일을 대구 시민의 날로 지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월 28일은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1960년 2·28민주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당연히 2·28민주운동은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도 등재되어 우리나라 모든 학생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배우고 있다. 즉, 우리 민족 현대사의 기념비적 사건을 일으킨 대구 시민들의 '2·28정신'은 대구 시민의 날로 지정되어 기림을 받아 마땅하다는 제안이다.
뿐만 아니라 2월 28일은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된 날이다.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 13명의 대구 젊은이들은 1915년 2월 28일(음력 1월 15일) 앞산 안일암에 모여 '목숨을 바쳐 국권 회복 운동을 할 것을 서약하고, 비밀결사인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조직'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 뒤에는 상해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군자금 조달 운동을 벌였다(대웅전 앞 안내판의 표현)'.
조선국권회복단은 조선광복회의 전신이었다. 이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본부가 대구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1915년 2월 28일은 충분히 대구시민들의 자긍심이 될 만한 날이다. 2월 28일을 대구 시민의 날로 삼자는 제안의 한 근거가 바로 그 날이 조선국권회복단 결성일이라는 말이다.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중심 조선국권회복단 그리고 국채보상운동까지 게다가 1907년 2월 21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기부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 2월 21일에 국채보상운동 기념행사를 시작하여 2월 28일에 대구 시민의 날 축제를 여는 식으로 '대구 시민 주간'을 운영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2월 말이면 시민의 날 행사를 하기에 춥지 않겠느냐고도 하지만, 이 무렵이 대체로 정월 대보름 전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좋은 날짜로 인정할 수도 있다.
달집 태우기 등등 민속 놀이들을 재현하면서 외세에 대항해 민족 자주 자강 정신을 불태운 조선국권회복단과 국채보상운동을 기려보자. 풍등 날리기, 윷놀이 등을 즐기면서 '이 땅에 처음으로 민권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였고 '당시 우리나라와 유사한 처지에 있던 제3세계 국민들에게도 희망의 빛을 던져 1960년대의 세계적 학생운동으로 번져나갔던'(대구근대역사관의 표현) 대구2·28민주운동을 되새기자. 2월 28일, 과연 대구 시민의 날로 적합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