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좁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고기복
근로기준법 제10장 101조 ①항에는 "사용자는 사업 또는 사업장의 부속 기숙사에 기숙하는 근로자의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번 조사에서 이주노동자 응답자들은 '기숙사가 주방·화장실·샤워장과 같은 편의시설이 방과 분리돼 있는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64.8%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28%나 됐다. 이 조사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이주노동자의 사생활 자유는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고 있었다.
전체 통계 수치로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주거 복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심각한 분야가 있다. 바로 농축산업과 어업 분야다. 농축산업이나 어업 분야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비닐하우스 거주 비율이 전체의 절반 이상인 56%였고, 그 외에는 28%가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었다. 비닐하우스·컨테이너 같은 공간에서 이주노동자의 사생활이 보장될 수 있을까. 화재나 외부인의 침입 등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이 보장될 수 있을까. 대답은 빤하다.
한편, 같은 법 시행령 제51조는 "남자와 여자를 동일건물의 기숙사에 수용시켜서는 아니 된다. 다만, 견고한 차단벽을 설치하고 출입구를 별개로 설치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명시돼 있다. 기숙사는 남녀분리가 원칙이라는 이야기인데 이주노동자들은 남녀 공간 분리는커녕 화장실조차 분리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농축산업과 어업 분야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중 농·축산업은 66.2%, 어업은 82.1%가 남녀화장실을 공용으로 쓰고 있었다. 남녀가 주거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것도 모자라, 화장실마저 같이 써야 되는 환경은 단순히 편의성 여부를 떠나 성희롱·성폭력의 피해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관리 감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을 들이대고 보면, 고용노동부는 고용허가제거 시행된 후부터 지금까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다. 근로기준법 103조 ①항은 "사용자는 부속 기숙사에 대하여 근로자의 건강·풍기와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여야 한다"고 돼 있고, 설비와 안전위생에 대한 규정도 있다. 이는 대통령령으로 정해 지키게 하고 있다. 만약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사용자에게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주노동자 기숙사 관련해 과태료가 부과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고용노동부가 시정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 역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주노동자의 주거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은 곧 인권침해로 이어지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성폭력이 벌어지는 장소 돼버린 '기숙사'
이번 조사에서 여성 이주노동자 10명 중 1명꼴인 10.7%가 성폭행이나 성희롱 등 피해를 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 결과 4.3%에 비해 무려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로 고용허가제 실시 이후 이주노동자 인권이 후퇴해도 한참을 후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다.
성폭력 피해 유형으로는 ▲ 강간(35.5%) ▲ 신체접촉(35.5%) ▲ 회식자리에서의 술 강요 및 신체 접촉(29%) ▲ 음란전화 혹은 음란물을 보여주는 행위(19.4%) ▲ 성매매 요구(12.9%) ▲ 특정 신체부위 노출 및 만짐(9.7%)의 순으로 나타났다. 성폭력 가해자를 묻는 항목에는 88.9%의 여성 응답자가 사장이라고 답했다.
성폭력 가해자의 열의 아홉이 사용자였다. 이는 여성이주노동자가 직면하고 있는 성폭력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준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을 위한 교육을 연 1회 이상 실시하고, 성희롱이나 성폭력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앞장서서 노력해야 할 당사자가 위계에 의해 가해자의 위치에 서서 고용허가제의 독소조항인 사업장 변경 횟수 제한 조항으로 피해자를 통제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 사회에서 여성 이주노동자를 위한 성희롱·성폭력 피해 근절 대책은 그 효과가 없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이 문제를 스스로 풀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사실상 성폭력 피해 사실을 신고하거나 사업장 상사·동료에게 털어놓은 이주노동자는 20.5%에 불과했으며 56.4%는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중 여성 이주노동자 68.2%가 신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여성의 경우가 남성보다 신고하지 않은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이유로는 ▲ 정보 부족 ▲ 언어불통 ▲ 창피함과 수치심 등이 고루 분포했다. 여성 이주노동자 47.7%는 불법체류 신고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성폭력이 위계질서에 의해 발생하며, 고용허가제가 사용자의 성폭력을 묵인케 하는 제도적 폭력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정부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기숙사가 운영되고 있는지 실태 조사를 선행해야 하고, 그에 따른 보완책으로 고용허가제의 독소 조항인 사업장 변경 횟수 제한 철폐를 이뤄야 한다. 즉 성희롱·성폭력 같은 신고가 들어올 경우 '선 사업장 변경, 후 조사'를 통해 피해자 구제를 우선하는 등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말이다.
이주노동자 성폭력 피해, 제도적으로 발생했다
기숙사가 성폭력 피해 장소가 되고 있고, 성폭력이 10년 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한 데는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 이동을 임의로 할 수 없다는 데 1차적 원인이 있다. 이 말은 기숙사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남녀가 같은 공간을 쓰고, 남녀가 같은 화장실·샤워장을 써야 하는 환경이라 언제든지 성희롱·성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장님, 기숙사 바꿔 주세요'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는 없다.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가 기숙사를 바꿔 달라고 하면, 사업장 변경을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 요구를 한 마디로 묵살해 버린다.
이번 조사에서 주거환경이 생활에 불편하다며 개선을 요구한 이주노동자가 29.5%였던 반면, 70%의 이주노동자는 기숙사에 관한 불만이 있어도 사업주에게 의사표현을 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주의 동의 없이 사업장을 변경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당연한 결과다. 그런 면에서 10년 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한 성폭력은 제도에 의해 폭력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기숙사와 이주노동자 성폭력... 부끄러운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