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은 2005년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집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뒤 대문 앞에 '남인수 생가'와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윤성효
집 앞에는 '예술인 남인수 생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또 다른 안내판에는 "1915년 건립. 남인수는 … 시대 감각에 잘 맞는 노래를 부른 가수로 평가받고 있다. 경남 서부지역의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택 형식을 취하였으며, 사랑채의 구조와 입면에는 근대적인 건축 기법 사용하였다"고 설명해 놓았다.
현재 집 안을 보면 본채 방문 위에는 남인수의 사진과 함께 <애수의 소야곡> 악보가 걸려 있다. 집 대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으며,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 건물의 기반은 모두 시멘트로 보수공사가 되어 있고, 옆면과 뒷면도 흙벽에 시멘트로 보수가 돼 있다.
개가한 어머니따라 강씨 문중으로... 친일 행적 뚜렷남인수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개가한 어머니(장화방)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아버지 '강영태')에 들어갔고, 이름도 '강문수(姜文秀)'로 바꿨다.
남인수는 1936년 <눈물의 해협>으로 가수로 데뷔했고, 1938년 <애수의 소야곡>을 불렀다. 그가 가수로 데뷔하기 전의 경력은 여러 설이 분분한데,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했다'거나 '중국어를 배우다가 경성으로 올라갔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런데 남인수는 친일(일제부역) 행적이 뚜렷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을 수록했다. 그가 부른 '친일 군국가요'가 많은데 <강남(江南)의 나팔수> <남쪽의 달밤> <낭자일기> <병원선> <이천오백만감격> <혈서지원> 등이다. 이 노래들은 모두 1942~1943년 사이에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