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두 지평이 만나는 지점에, 하나의 생각이 온갖 난해한 절망을 딛고 다시금 희망을 추동한다."
김진형
안희경이 놈 촘스키 교수를 찾은 것은 구럼비 바위에 대한 첫 번째 발파가 있었던 지난해 3월이었다. 제주 강정마을에 건설되던 해군기지를 둘러싼 갈등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Don't Kill Kangjung Kurumbi'의 첫 글자를 딴 'D.K.K.K 운동'이 국제적으로 이슈가 됐다. 촘스키 교수와의 대화는 제주 해군기지 문제로부터 시작했고, 그는 'D.K.K.K'가 쓰여 진 종이를 들고 마음을 함께했다.
안희경은 '신자유주의의 논리 아래 구럼비 바위가 파괴되듯 세계질서의 변화 속에서 오랜 시간 이어온 인간의 고유한 터전이나 생명에 대한 존엄이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토로했고, 촘스키는 신자유주의 규칙을 거부하는 오큐파이 운동을 주목하며 다수 민중의 의지를 구현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촘스키의 연구실에 걸려 있던 이스라엘 소인이 찍혀 반송된 편지 한 통이었다. 팔레스타인으로 보냈지만, 그런 주소를 찾을 수 없다는 '수취인 불명' 통지가 찍혀 반송된 편지였다. 유대인 촘스키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고통 속에 함께 있고자 했다. 그는 2012년 10월 18일 여든다섯의 나이로 처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방문해 연대의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본문 38쪽)두 번째로 만난 석학은 로버트 서먼 교수였다. 그는 피의 혁명, 뜨거운 혁명은 강력해 보이나 한시적이며 또 다른 역동을 야기하기 때문에, 개인 내면의 혁명을 통한 비폭력적 '차가운 혁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여성이었다. 여성이야말로 '평화를 지키려는 본성'을 가진 존재로, 군국주의적이며 산업적 탐욕에 물든 남성의 폭력적 세상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봤다. 또한 진정한 여성성은, 평화의 본성을 거스르는 '마초적 여성'과 남성적 관습에 지배당하고 길들여진 여성을 극복할 때 구현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옳은 지적이다.
4·11 총선 직후 만난 조지 레이코프 교수는 '프레임' 이론의 권위자였다. 그는 진보 진영을 향해 "도덕적 가치 속에서 정책을 설명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보통 진보 정치인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 접근으로 정책적 우위를 점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종종 실패한다. 레이코프는 공감의 언어를 그리고 네거티브 캠페인은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디어를 장악한 보수에 맞서 진보의 언어는 더욱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진보 정치인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충고가 아닐까 싶다.
자유주의적 활동을 가동시키려면 고유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거죠. 저들의 언어가 미디어를 장악했고 저들의 언어가 표준이 됐기에, 우리는 창의성을 발휘해서 우리의 언어를 개발해야 합니다.(본문 109쪽)우리나라에 <몰입>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하이 첵센트미하이 교수와는 교육의 문제를 다룬다.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학생에게 자율권을 주고, 학생 스스로 배움에 책임감을 갖게 하고, 동료와 함께 팀을 이뤄 문제를 풀어가게 하는 것', 이 세 가지가 교육 시스템의 근간이 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안희경은 카밀리아 발도로프학교의 예를 들어, 경쟁보다는 협력을 배우면서 스스로 행복을 찾는 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그 학교의 모토 '교육은 경주가 아니라 여정(旅程)이다'를 소개한다.
윤리학의 거성이자 실천하는 지식인 피터 싱어 교수는 '동물의 산업화'를 호되게 비판하며, 빈곤의 문제와 좌파가 역사적으로 실패한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가 주장한 것은 '다윈주의 좌파'였다. 그는 정치적인 세력으로서의 좌파가 아닌 더 나은 사회를 이루려는 하나의 사상으로서의 좌파를 모색했다. 즉 공공의 이익을 향한 공리주의적 실천이었다.
신학자이자 민중 지도자인 코넬 웨스트는 마틴 루서 킹의 뒤를 잇는 상징적 존재다. 인종 문제·빈곤문제에 맞서 싸웠고 강력히 저항했다. 그는 가난을 신자유주의 폭거의 산물인 '현대판 노예'로 정의했다. 그는 완벽한 한국어 발음으로 '민중'이라는 단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당시 박근혜 후보를 '독재자의 딸(The Dictator's Daughter)'로 불렀다. 또한 예언자적 영성을 강조했다. 불평등과 타협하지 않고 현실에 저항한 예언자적 영성은, 종교와 세상, 종교와 민주주의를 잇는 고리로서 공공선을 추구한다. 한국의 기독 교회들이 외면하는, 그래서 무기력한 교회들이 들어야 할 통찰이다.
마지막 대화는 에코-페미니스트인 반다나 시바와 함께한다. 시바는 인도 델리에 기반을 두고 토종 종자 보전과 생태적 환경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나는 특히 그녀와의 대화가 감동적이었다. 그녀는 여성을 수동적 존재로 보는 것에 단호히 반대했다. 되레 "가부장적 자본주의는 자연이 착취의 대상이므로 마땅히 죽는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여성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고, 나는 훗날 나의 딸의 성장한 다음 이 문장을 주기 위해 옮겨 놨다.
보통의 여성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첫째, 열등하다고 느끼지 말자는 겁니다. 두 번째는 소외감을 느끼지 말자는 것이고, 세 번째는 그대의 가슴이 그대의 마음에게 말하도록 허락하자는 것입니다.(본문 258쪽)또한 그녀는 한국의 자랑인 기업 '포스코'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세계은행은 한국의 자산을 사유화했고, 포스코의 실제 오너는 5%의 주식을 가진 워런 버핏이다. 포스코는 중국으로 철강을 수출하기 위한 넓은 육로 확보를 위해 농민들을 강제 이주시켰고 땅을 수탈했다. 경찰이 무력으로 어린이와 여성을 공격했고 살해했다. 그곳은 원주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숲과 폭포가 있는 곳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할 것이다.
저는 세계은행이나 포스코가 한국의 부를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한국의 부는 열심히 일한 한국인들이 만든 겁니다…. 제가 한국인들에게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겁니다. "여러분은 인도에서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음에 기초한 번영을 얻고 싶은가요? 우리는 하나의 인류입니다." 이는 '나는 오른손의 번영을 돕기 위해 내 왼손을 자를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본문 259쪽)"미국은 부시로부터 살아남았다는 걸 기억하길"<오마이뉴스>에 연재하던 당시 기사로 읽던 느낌과 책으로 읽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아랍의 봄' 이후,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곧 점령할 것만 같았던 오큐파이 운동을 접하며 흥분하곤 했다. 죽음을 담보로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올랐던 김진숙 지도위원을, 희망버스로 309일만에 기어코 구출했던 감격은,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한껏 부픈 기대감으로 충만했다. 그런 맥락 속에 석학들의 대담은 희망의 전조로 읽혔다. 곧 다가올, 불과 며칠, 몇 달만 견뎌내면 도달할 희망처럼 보였다. 하지만 희망은 결국 좌절했다.
다시 읽은 이 대화록은 여전히 희망의 전조로서 유효하다. 되레 세계의 석학들은, 정치적 역학 구도 따위로 희망의 가능성을 가늠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의 민중들, 그들의 결기어린 희망. 그 거대한 흐름에 주목하되, 그 시작은 나의 삶의 영역에서, 나란 존재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다나 시바는 온 세상이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임을 강조했다. 온 세상이 연결돼 있기에 결국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로버트 서먼은 세상을 바꾸는 주체는 정치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라는 자각이 필요하다고 거듭 역설했다.
또한 세계의 석학들은 한국의 역사에 주목했다. 피터 싱어는 한국의 대선 결과를 접하며 "무엇보다도 이걸 기억해주세요, 미국은 조지 W. 부시로부터 살아남았다는 걸 말입니다!"라고 위로했다. 희망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냐는 질문에, 촘스키는 "그 답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한국을 희망의 상징으로 기억했다.
1980년대, 그때 한국인들은 잘 조직됐고, 함께 모였고, 열심히 싸웠어요. 매우 용감하게, 매우 효율적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잔혹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자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무너뜨렸죠. 이 땅에 대단한 민주적 혁명이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바람을 일으켰죠. 그때 한국인들은 누구에게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고, 오직 그것을 하고 있을 뿐이었고 해냈습니다.(본문 42쪽)우리는 아직 지지 않았다. 총선이나 대선은 오히려 작은 싸움이다. '롬니에 비해 오바마는 단지 차악(次惡)일 뿐'이라는 로버트 서먼의 지적처럼, 지난 대선에서 다른 결과가 나왔더라도 어쩌면 그것은 차악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공동선의 가치는 결코 한걸음에, 단숨에 오지 않는다. 하지만 단호한 실천으로 시작된 한 사람의 희망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생각, 하나의 실천이다. 그리고 연대하는 것이다. 2011년 10월 주코티에서 오큐파이 운동을 펼치던 시위대에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는 길로 빠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유쾌한 순간을 맞고 있지만, 축제를 여는 데는 그렇게 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중요한 건 축제가 열린 그 다음날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무엇이 변화되어 있을까요?(<르 몽드 리블로마티크> 1월호 중에서)자, 우리 자신이 희망의 전조임을, 이제 우리 스스로 입증할 차례다.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 세계의 지성들이 말하는 한국 그리고 희망의 연대
안희경 지음,
오마이북, 2013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패배한 48%에게 희망의 전조로 유효한 '대화록'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