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어느날, 아버지가 인사도 없이 떠나셨다

[그 엄마 육아 그 아빠 일기 6] 봄날, 뜻하지 않은 이별, 그리고 만남

등록 2013.04.03 18:55수정 2013.04.03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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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일은 친정 아빠 생신이었다. 2월 3일에 셋째를 출산한 터라 설에도 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친정에 걸음을 못했고, 친정 아빠 생신에도 다녀오지 못했다. 조금 무리를 해서 내려가 볼까 했지만 아직 어린 막내와 출산 후 회복이 덜 된 내겐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해서 꽃 피는 4월에나 2~3주 일정으로 친정에 머물다 오기로 하고 아쉬운 마음을 접어야 했다.


겨우내 만삭의 엄마, 출산한 엄마, 신생아 동생 때문에 바깥나들이를 거의 못한 아이들은  넓은 마당과 가축들이 있는 외가에 갈 봄날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나 역시 12월 초에 다녀오고 못간 친정 나들이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친정 부모님도 손주들과 통화할 때면 "그래 꽃 피는 봄에 놀러오너라"하시며 보고픈 마음을 달래셨다. 꽃이 만개하진 않았지만 봄은 왔고, 4월 중순경으로 계획했던 아이들의 외가 나들이는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하게 한 달이나 앞당겨졌다, 불쑥, 너무나 불쑥.

외가집 최고의 즐거움 모래놀이 .
외가집 최고의 즐거움 모래놀이.정가람

"꽃 피는 봄에 놀러오너라~"

간경화를 앓고 계셨지만 몇 년은 더 우리 곁에 계실 거라 믿었던 아빠였는데, 생신에서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아무런 인사도 없이 떠나시고 말았다. 너무나 급작스런 이별에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한 우리 다섯 식구는 깊은 밤, 친정집도 병원도 아닌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그저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라며 상복을 입고 하얀 머리핀을 꽂고 장례기간을 보냈다. 풀썩 주저앉고 싶은 순간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40개월, 22개월, 2개월 어린 것들의 엄마인 나는 조문을 받고 누군가의 위로를 받으며 눈물을 흘리다가도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친척들 틈에서 재롱을 부리다가도 문득 내게 달려와 보채는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아빠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갓난쟁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자니……. 그동안 대본을 쓰며 죽음을 그린 적이 많았건만, 현실에서, 그도 내 아버지의 죽음은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잡히지 않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아빠 없이 혼자 남게 되신 친정엄마 걱정에 남편과 상의해 한 달 정도 아이들과 함께 친정에 머물기로 했다. 그러나 다급히 내려간 걸음이라 준비 못한 게 많았다. 삼우제를 지내고 첫째를 외가에 남겨놓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엄마만 남겨놓고 오기 어려운 걸음이었는데 외할머니를 잘 따르는 첫째가 선뜻 외가에 남겠다고 했다.


태어나 아직 단 하룻밤도 엄마 곁을 떠나 자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몇 번을 물어도 외할머니와 있으면 괜찮다며 서울집에 가서 아빠 밥도 해놓고 제 장난감도 챙겨오라는 첫째. 아이가 할머니 품에서 잠든 것을 보고 무거운 밤길을 나섰다.

고사리손으로 감자 심는 첫째 .
고사리손으로 감자 심는 첫째.홍예성

"내 장난감 챙겨서 일곱밤 자고 와"

아빠를 먼 산 너머로 보내고, 아이를 내가 자란 집에 남겨놓고 보낸 일주일. 반은 인사도 못하고 보낸 아빠 생각, 반은 남겨놓고 온 첫째 생각에 이것저것 정리하자고 올라온 서울집에서 하루 한 가지 정리도 겨우 해냈다. 생후 50일이 채 되지 않은 막내는 장거리를 다녀온 탓인지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잤다.

누나도 없고 동생은 거의 자고 있으니 둘째는 내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20개월이 다되도록 엄마 사랑을 독차지해 본 적이 없는 둘째였다. 늘 누나와 아웅다웅하던 장난감도 갖고 놀지 않고 내게 붙어 뜨겁게 애정표현을 해댔다. 짠한 마음에 나 역시 최선을 다해 둘째를 돌봤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누나와 싸우다 울고 내게 혼나 또 울던 둘째는 누나가 없으니 일주일 동안 거의 혼나지 않고 울지도 않고 차분하게 보냈다. 

외가에 혼자 남은 첫째는 어떻게 지냈을까?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전화를 해볼까 하다 혹시나 엄마 목소리를 듣고 딸아이가 울까봐 문자만 보내고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 종일 전화는 오지 않았다. 저녁이 다 되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니 엄마도 찾지 않고 너무나 잘 지낸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와 함께 도서관에 가 책도 빌리고, 오후엔 외삼촌과 텃밭에 감자도 심고. 쉴 새 없이 종알거리며 뭔가를 하자고 졸라대는 외손녀 탓에 친정엄마도 덩달아 바삐 하루를 보내고 계셨다. 무거운 슬픔이 감도는 집에 한 마리 새처럼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딸아이였다.

시골 패션의 완성은 헌가방과 고무신
시골 패션의 완성은 헌가방과 고무신홍예성
잘 있다는 전화를 받고 둘째에게 집중하며 애썼지만 마음 한켠은 늘 친정집의 딸아이에게 가 있었다. 친정 부모님께서 텃밭의 농작물들로 가득 채워 보내주시던 택배처럼 나 역시 첫째가 좋아하는 것들을 채워 택배를 보냈다. 첫아이 임신했을 때였던가, 친정집에서 택배가 왔다. 여러 가지 틈 속에 20년 넘게 집 앞마당에서 자라고 있는 석류가 몇 알 들어있었다. 석류 좋아하는 딸을 기억하는 아빠의 마음이었다.

뒤늦게 깨달은 택배 상자의 사랑

첫째 출산 후 겨울엔 아빠가 직접 시장에서 골라 사오셨다던 유자가 들어있기도 했다. 막내 출산 후엔 산모가 잘 먹어야한다며 아빠께서 우족을 사오시고 엄마께서 밤새 뽀얀 국물을 우려 보내주시기도 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엔 작년 가을 내내 아빠께서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며 기르신 봄동이 한 상자나 택배로 왔었다. 그렇게 늘 받기만 한 딸은 제 딸이 친정에 있으니 그때서야 택배를 보냈다, 제 딸아이 물건만 잔뜩 담아.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지만 참 어리석고 죄송한 사랑이기만 하다.     

첫째 딸아이는 오로지 제 앞으로 온 택배에 신이 났고 외할머니 스마트폰이 제 것인 마냥 들고 다니며 수시로 나와 영상통화를 하며 동생들까지 챙기며 일주일을 보냈다. 하루 종일 외할머니 곁에 붙어있으면 친정 엄마가 힘드실 거 같아 읍내 미술학원에 보내달라 부탁을 드렸더니 기관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동생들에게 치였던 외손녀가 안쓰러우셨던 친정 엄마는 미술학원에 피아노학원까지 보내셨다.

난해한 그녀의 작품세계 .
난해한 그녀의 작품세계.홍예성
만 세돌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집은 물론 학교도 가지 않고 엄마 곁에 있겠다던 첫째였는데, 만 세돌을 넘기자 유치원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아파트에 몇 있는 제 친구들이 죄 어딘가를 다녀 낮에 놀이터에 나가면 늘 제 동생뿐이어서 좀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친정엄마께서 성당 아나바다 장터에서 사 오신 유치원 가방을 건네며 내일은 학원에 간다했더니 첫째는 밤늦도록 헌 가방을 메고 온 집을 돌아다니며 내일이 되면 학원에 간다며 노래를 했다한다. 물론 내게도 전화를 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3월, 이별과 시작의 봄날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가방을 메고 학원에 가자 졸랐음은 안 봐도 눈에 선한 일. 아직 한 번도 엄마를 떠나 제 혼자서 낯선 곳에 일정 시간 떨어져 있어본 적 없던 첫째여서 걱정이 되었지만, 걱정과 달리 첫째는 상기된 얼굴로 가방을 메고 뭔가를 배운다는 기쁨에 비누방울처럼 날듯이 학원에 다녀왔다 한다. 3월은 추운 겨울과 이별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때, 올해의 3월은 이별도 시작도 모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버렸다. 나를 낳은 아빠께선 늙어 먼 곳으로 가시고, 내가 낳은 아이는 내 손을 놓고 세상으로 갈 준비에 신이 나 있는 3월의 봄, 이별과 시작의 봄날이다.

한 달 정도 비울 집, 안팎으로 정리도 하고 갖고 갈 짐도 꼼꼼히 싸려했건만, 아지랑이 같은 생각들로 멍하니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친정으로 향했다. 아직 수 개념이 명확하게 없었던 첫째는 엄마아빠와 동생들을 기다리며 일곱 밤에서 한 밤까지 확실히 깨쳤고 드디어 출발했다는 전화에 돌고래같은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겨우 꽃봉오리만 내민 것을 보고왔던 친정집 앞마당의 목련은 일주일 새 하얀 꽃잎을 내밀고 있었다. 예고없던 이별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는데 고개 들어보니 봄, 그렇게 기다리던 봄이다.

아빠가 곳곳에 뿌려놓으신 봄의 위로

아빠가 뿌려놓으신 봄의 위로 .
아빠가 뿌려놓으신 봄의 위로.정가람

하루가 다르게 친정집 마당엔 아빠가 좋아하시던 계절이 만개하고 있다. 친정엄마와 아이들 손을 잡고 마당을 걸으며 아빠를 느끼며 따뜻하고 가득 찬 봄을 보내야겠다. 아빠가 곳곳에 뿌려놓으신 봄의 위로를 받으며. 아빠를 잃어버린 삼월이 아니라 아빠를 따뜻한 곳으로 조금 먼저 보내드린 삼월이라 생각하며. 그래도 남겠지, 때늦은 아픈 후회는.

끝으로 생전에 아빠가 남기신 몇 편의 글 중 몇구절을 아빠의 유언 대신 가슴으로 읽어보며 봄날의 뜻하지 않은 이별에 안녕을 고한다.

"길을 갑니다. 꼬마들도, 학생들도 젊은 청춘 남녀도 연세 많아 지팡이를 든 할아버지 할머니를 봅니다. 여기에 바로 내가 함께 가고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나의 거울을 발견합니다. 놀랍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고 화살 같다고 합니다. 마냥 어릴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습니다. 한 밤을 지나면 하루가 죽어 가고 한 밤을 깨고 나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됩니다. 죽음이 있기에 인생은 아름답고 열심히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는 꽃잎은 내년을 기약합니다. 우리가 한 송이 국화꽃이라면 오상고절(傲霜孤節) 청초함을 자랑하다 서리 맞고 시들었다가 내년이면 다시금 피어나겠지요."           

(지리산 자락 경남 산청 외가에서 보내는 아이들의 봄날의 일기가 곧 시작됩니다. 아빠 없이, 장난감 없이 보내는 봄날이 아이들을 어떤 모습으로 키워줄지 엄마인 제가 가장 궁금합니다.)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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