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의 사당인 대빈궁이 있었던 곳. 철거된 곳이 대빈궁 터다. 종로세무서 신청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2011년 4월 12일에 찍은 사진.
김종성
죽은 장옥정과 가장 관련이 깊은 장소라고 하면, 이곳에 장옥정의 무덤이 있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양 사대문 안에 왕실 무덤이 세워진 예는 거의 없었다. 장옥정의 무덤인 대빈묘는 그가 죽은 1701년 이래로 경기도 양주 및 광주를 거쳐 고양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고양시 서오릉 경내에 있다. 따라서 낙원동 58-8은 장옥정의 무덤과는 상관없는 곳이다.
현대인들은 죽은 사람과 관련하여 그의 무덤을 가장 중시한다. 그런 관념의 연장선상에서 납골당도 중시한다. 하지만, 20세기 이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무덤보다는 사당을 더 중시했다. 사당에는 죽은 자의 영혼이라도 있지만, 무덤에는 껍데기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대학자이자 광해군 정권의 핵심 멤버인 어우당 유몽인이 정리한 실화집인 <어우야담>에는 "사람이 죽으면 해골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옛날에 소중하게 여긴 것은 사당이지 무덤이 아니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무덤보다 사당을 더 중시한 옛날 사람들의 관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옛날에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사당을 중시했다는 점은 사서오경의 하나인 <예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곡례' 편에서는 "군자가 집을 지을 때는 사당이 가장 먼저이고, 마구간과 창고가 그 다음이며, 자기 거처는 맨 나중이다"라고 했다. 군자는 부모의 사당을 가장 먼저 짓고, 그 다음에 실용적인 건물을 지으며, 맨 나중에 자기 거처를 지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사당이 중요시됐던 것이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는 병자호란 때 임시 궁궐로 사용된 행궁이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행궁의 오른편에는 왕실 사당이 있다. 한양에 있는 종묘의 복사판이 복원되어 있는 것이다.
병자호란 때 왕실에서는 전쟁을 피해 왕궁을 옮기는 김에 사당도 함께 이곳으로 옮겼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렇게 한 것은 왕실 사당 즉 종묘가 없어지는 것은 곧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묘사직이 국가의 동의어로 사용된 것도 이런 관념 때문이다.
사람은 죽으면 껍데기에 불과... 무덤보다 소중했던 '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