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용만. 소설을 쓸 수 있기에 일흔을 넘긴 나이임에도 행복하다고.
스튜디오 다홍
- 그 시절 경찰생활은 어땠나. 안정적인 공무원이 됐는데도 문학의 꿈은 포기가 안 됐는지."대용교도소 교도관, 정보경찰, 해안 경비, 파출소 순경 등 다양한 부서 체험을 했다. 1960년대엔 강원 강릉 등에 있었다. 이후 서울 중부경찰서로 갔다. 그런데 거기선 업무가 너무 바빠 도저히 문학공부를 할 수 없었다. 소설이 너무 쓰고 싶었다. 하지만 한일회담 반대시위 등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상황에서 '경찰의 소설 창작'이란 그저 꿈에 불과했다.
그래서 부산과 강원도 동해안 근무를 지원했다. 일종의 자의적 좌천이다. 내가 강원도에 있을 땐 바닷가에 북한 공작원 침투 방지를 위한 철조망도 없었다. 동해안을 통해 들어오는 남파 간첩을 막는 게 임무였다. 하지만 간첩이 매일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근무는 비교적 한적했다.
하루 종일 책 읽고 공부만 하던 시절이다.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거기서 어민들의 사정을 봐주다가 구속영장이 떨어진 일이 있다. 금어기 때 출어 허가증을 끊어준 것이다. 당시만 해도 북한 어역에서 작업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구속시키는 게 원칙이었는데 그들의 사정을 고려해 구속시키지 않았다.
그 시절엔 북한 해역에선 명태가 엄청나게 잡혔다. 봄이 되면 어족 보호차원에서 어업금지령을 내렸는데, 어민들이 굶어 죽는다고 난리였다. 그 지역 검문소장이던 내가 어민들의 사정을 봐줬다가 구속영장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구속되진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가 나타났다. 그때 토벌작전에 참여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구속이 아닌 1개월 감봉으로 처벌이 바뀐 것이다. 현대사의 한 단면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이때 경험은 내 소설의 주요한 소재가 됐다. 그 이후엔 강원도 양구로 갔다.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양구까지. 참으로 먼 길을 걸었다. 아내는 양구 근무시절에 얻었다.
그러다가 서울 동대문경찰서로 왔고, 정보형사 생활을 했다. 남들은 이런 말을 한다 '네 인생이란 게 결국은 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 되도록 토끼몰이 된 것 같다'고. 서울대학교 담당 정보형사로 꽤 오래 일했다. 20대 후반, 30대 초반 시절이다.
당시는 경찰서 정보과의 위세가 대단한 때였다. 그 시절 이야기 역시 소설로 썼다. 야당 당사 출입도 자주 했는데, 내 기질 때문인지 야당 정치인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돌아보니 그때가 유신이 선포되기 얼마 전이다.
첫 작품집 <늰 내 각시더>를 실천문학사에서 냈다. 1992년 즈음이다. 당시는 거기서 책이 나오면 경찰이 내사에 들어가던 시절이다. 출간되고 얼마간 정말 시끄러웠다. 첫 책엔 단편 <그리고 말씀하시길> 등이 실렸다. 고맙게도 신문마다 작품집 출간소식을 크게 다뤄줬다. 신경숙, 윤대녕 등과 함께 주목받는 신인으로 신문에 오르내렸던 기억이 새롭다. 그즈음 제대로 된 문학공부를 못 한 것이 너무 억울하고 서러워 오십 넘긴 나이에 대학엘 갔고, 대학원을 다녔다."
- 본격적인 등단과 작품 활동 이전엔 어떤 일을 했나. 그러니까 경찰을 그만두고 난 이후 말이다."소설을 쓰려고 경찰을 그만둔 게 1970년대 초반이다. 고생을 많이 했다. 퇴직 후 부산에 가서 군대시절 친구를 만났다. 그의 연애편지를 대필해준 것이 인연이 돼 오랜 기간 교류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쥐뿔만큼 받은 퇴직금을 사기꾼에게 걸려 다 날렸다. 도저히 안 되겠다싶어 생면부지의 대구로 갔다. 조그만 자동차수리점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화재로 가게를 태워먹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포장마차도 하고, 식당도 하고….
아내가 고생을 심하게 했다. 시골에선 먹고살 만한 집 딸이었는데, 남편을 잘못 만나서. 그럼에도 나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처갓집 신세는 지기 싫었다. 남은 돈을 긁어모아 테이블 3개의 콧구멍만 한 식당을 열었다.
그런데 그게 대박이 터져 장안에서 제법 유명했던 춘천옥이 됐다. 장사가 잘 될 때나, 손님이 없어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할 때나 문학에 대한 꿈은 버리지 못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 돼도 일기는 빼놓지 않고 썼다. 나중에 보니 그게 내 문장력의 초석이었다.
등단 직후에는 소설가 김원일, 김주영과 친했다. 이들과 어울려 인도 등도 여행했다. 술자리에선 가끔 내 첫 작품집이 안줏거리가 됐다. 갓 등단했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이야기다. '정말 인상 깊게 읽었소. 앞으로도 꾸준히 이런 작품을 쓰시오'라는 선배 작가들의 격려와 편지를 여러 차례 받았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에게서 받은 편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에밀리 브론테에 관한 내 글을 읽고 보내준 편지였다. '사장된 우리의 토속 언어를 절차탁마했다'는 평가가 참 기분 좋게 들렸던 시절이다."
"내게 의식이 남아 있는 동안엔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