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지 많은 창고에 돗자리를 깔면 그곳이 휴게실이 되지만 제대로 쉴 수도 없다. 전시장을 울리는 스피커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특정 에이전시와는 관계 없습니다. 이 사진은 특정 에이전시와는 관계 없습니다.
이재윤
보통 모델 에이전시는 모터쇼가 열리기 3개월 전쯤 모델을 선발한다. 모델이 자신의 신체 사이즈와 얼굴, 전신 사진을 메일로 보내면, 자동차 회사 직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면접이 진행된다. 최종적으로 자동차 회사가 차량에 맞는 모델을 선택하면 에이전시와 계약이 이뤄진다.
이번 서울모터쇼에 참가한 세 개 차량 브랜드 모델 여섯 명이 공개한 계약서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갑'에 해당하는 자동차 회사명은 아직 '선정 중'이며, 사업자등록번호와 전화번호가 없고 대표이사 서명도 없다. 대금 지급 기한 또한 쓰여있지 않다. 계약서상 '을'인 에이전시로부터 임금 관련 사항만 간단히 듣고 '병'인 모델들은 따로 계약서를 살펴볼 시간도 없이 5분만에 계약을 끝낸다.
"잘못된 거 따져봤자 돈 못 받으면 게임 끝이야. 일 끊기면 수입이 0원인데. 모델 일은 인터넷 공지로 안 뜬다고. 에이전시 연락이 내 돈줄이야. 에이전시 말에 '왜요'라고 토 달면 안돼. 여기선 에이전시 눈 밖에 나면 바로 일 끊겨."모델 경력 15년차인 ㄷ(28∙여∙부산)씨 말대로 몇 안 되는 레이싱모델 에이전시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한 곳에서 마찰을 일으키면 다른 에이전시에서도 일하기 힘들다. 그 때문에 모델들은 에이전시의 부당한 임금 협상과 산업재해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 경력 10년차 모델 ㄹ(29∙여∙경기)씨는 임금을 책정할 때 뚜렷한 기준이 없는 것이 불만이지만, 그녀가 항의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열흘간 차 앞에서 사진 찍는다기에 더 묻지 않고 200만 원에 계약했지. 해도 너무하지. 10년차 모델이랑 신입한테 어떻게 같은 돈을 주냐? '일 페이' '총 페이' 말만 복잡하지 금액은 같잖아. 내가 여기 서서 뭐 하고 있는 건지. '갑·을·병'이 아니라 내가 병신이네."에이전시는 ㄹ씨에게 경력에 따라 임금이 차등지급된다고 했지만, 모델 10년차와 경력이 없는 만 19세 모델이 같은 돈을 받았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했지만, 서울모터쇼 모델들의 임금은 경력과 모터쇼 경험 횟수와 무관하게 180만 원에서 1100만 원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이마저도 모델들끼리 친해지고 나서야 알게 됐다. 임금 관련 사항은 비밀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임금 관련 사항을 잘못 발설했다가는 계약 규정 위반으로 '해고'를 당할 수 있다.
일 없으면 실업자... 유럽에선 실업수당까지 현재 우리나라 레이싱모델은 비정규직 노동자 중에서도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분류된다. 자동차회사들은 에이전시를 통해 위탁∙촉탁 형식으로 모델들을 고용하고도 노동법상 책임을 회피한다. 모델들의 임금은 자동차회사가 지불하는 대금에서 에이전시가 중간 마진을 얼마나 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모델은 에이전시가 자동차회사에서 어떤 조건으로 얼마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임금은 현금으로 지급돼 소득신고 또한 불투명하다. 경력 7년차 모델 ㅁ(24∙여∙서울)씨는 "세금이나 보험, 소득신고 같은 것은 따로 해본 적이 없다"며 "다만 에이전시에서 임금을 지급할 때 계약한 총 임금에서 세금(원천징수세) 3.3%를 뗀다고 하지만 사실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아프거나 사고당하면 번 돈을 병원에 다 쓴다"는 한씨 말대로 서울모터쇼에서 만난 28명 모델 중 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일이 끊겨 수입이 없는 모델에게도 실업수당을 지급한다. 지난 10개월간 507시간 이상 근로하며 세금을 냈다면 최대 8개월간 실업 수당을 받는다. 독일, 네덜란드 역시 창작예술인을 위한 사회보장법에 따라 모델도 일반 직장인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제도, 건강보험, 노령연금의 혜택을 받고 있다. 외국의 모델은 복지혜택뿐 아니라 건전한 생산활동을 하는 직업인으로 존중받는다.
수천개 조명이 빛나는 모터쇼장의 서러운 인생이 어디 레이싱모델뿐이랴. 근로계약서도 없이 수많은 방문객이 다녀간 화장실을 행사 내내 청소하는 아주머니부터, 전시된 차에 지문이 묻을까 연신 세정제 묻힌 걸레로 닦는 청년까지. 반짝 행사에 고용된 1만2천여 특수형태 근로종사자들의 열흘은 2013 서울모터쇼의 표어 '자연을 품다, 인간을 담다'를 무색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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