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텔레비전에 '테러 폭발물 정체는 압력솥'이라는 자막이 떠있다.
조명신
보름 전쯤 댈러스에 사는 친구에게 미국 출장 소식을 알렸습니다. 반가워하더군요.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집에 들르기로 했습니다. 짐이라고 해봐야 간단한 옷가지가 전부일 테니 필요한 물건 있으면 사다 주겠노라고 물었습니다. 부인에게 물어본다더니 '압력솥'을 부탁하더군요. 미국에서도 솥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 '한국의 뜨신 밥'이 먹고 싶었을 겁니다. 인터넷으로 주문해 받아보니 요즘 유행하는 압력솥인지 상당히 무겁고 좋아 보이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출국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보스턴을 강타했던 폭발물의 정체는 '압력솥'이라는 속보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박스 부피 때문에 압력솥만 꺼내 가방 안에 넣었는데 딱 의심받기 좋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바퀴 달린 짐가방을 끌고 공항으로 향하는데 모든 정신이 압력솥에만 집중되더군요. 아무도 가방 속 압력솥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무슨 테러용의자라도 되는 양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짐을 맡기고 보딩패스를 받았습니다.
한숨 돌리고 탑승구 부근 텔레비전 앞에 앉았는데 '폭발물의 정체는 압력솥'이라는 자막이 계속 나오더군요. 짐은 이미 부쳤겠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신경을 껐습니다. 압력솥이라는 이유만으로 의심받는다면 밥을 사랑하고 쌀을 생명처럼 여기는 반만년 우리 식문화에 대한 모욕이라고 맞받을까 생각한 정도지요. 미국에 도착해 입국심사를 마치고 국내선을 기다리는데 미국 방송은 한 술 더 뜨더군요. 이 백인 리포터는 어디서 구했는지 압력솥 하나를 들고 나와 이번 테러에 이용된 제품이 어떤 것인지 설명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누군가 저를 집요하게 놀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신경이 곤두섰던 제 속마음과는 달리 아무 문제 없이 최종 목적지인 오스틴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보스턴과는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도 그렇겠지만 입국장은 아주 평온한 느낌이었습니다. 입국심사를 하는 직원이나 세관 직원들은 이런저런 짧은 한국말을 섞은 가벼운 농담으로 맞아주었고 공항에 내걸린 조기 이외에는 테러로 신음하는 미국의 얼굴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공항을 빠져나와 호텔로 와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낮과 밤이 바뀐 탓에 몽롱한 정신을 깨우려 텔레비전을 켰더니 시엔엔(CNN)에서는 백악관을 생중계하고 있더군요.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한 총기 규제책이 상원에서 고비를 맞는 상황에서 마련된 일종의 대국민 호소였습니다. 지난해 12월 발생한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참사로 자녀를 잃은 한 아버지의 눈물 어린 호소 이후 등장한 오바마 대통령은 의회와 국민을 향해 총기 규제 입법을 요청했습니다. 짧고 간결한 언어로 설득력 넘치는 내용이었지만 참석자들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습니다.
테러도 그렇고 총기 규제도 그렇고 어려운 문제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뿌리는 깊고 해결의 실마리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너무 많은 이권과 협잡의 역사가 얽혀 있는 탓이겠지요. 새벽에 잠에서 깨 텔레비전을 켜고 채널을 돌리니 예의 그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됩니다. 여러 매체에서 수많은 기자들이 실시간으로 쏟아내는 그 무겁고 힘겨운 뉴스가 오늘의 미국을 촘촘히 에워싸고 있습니다. 35번 고속도로 옆 작은 호텔에서 미국의 저널리즘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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