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_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책표지
김진형
일본의 니체로 주목받는 철학계의 신성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제목부터 섬뜩하고 도발적이다.
파울 첼란의 시에서 차용한 것으로, 언뜻 느껴지는 첫 인상과 달리 이 제목의 본의는 '전진'에 있다. 손의 절연은, 더 이상 지금까지의 세상에 안주할 수 없다는 굳은 결의의 은유다.
폭력적 혁명 이전에 텍스트가 있었으며, 혁명의 근본은 읽기에서 비롯되었다.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읽기가 곧 혁명이 된 역사적 사례로 루터와 무함마드, 그리고 12세기의 '해석자 혁명'을 제시한다.
농민의 아들이었던 루터는 성서를 읽고 또 읽으며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세상의 지배 권력에 맞선 새로운 변혁의 중심이 되었다. 동굴에서 기도하던 무함마드에게 나타난 대천사는 읽으라고 명령하고, 문맹이었던 그는 기어코 읽음으로 <코란>은 탄생하였다.
12세기 '해석자 혁명'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발견되고, 600년 가까이 묻혀있던 로마법을 교회법으로 새롭게 고쳐 쓰는 과정을 통해, 그라티우스 교령집이 완성되었다. 중세 해석자들은 세례, 교육, 혼인, 성범죄, 고아와 과부의 사회적 약자 보호 등에 대한 '삶의 규칙'을 세웠다. 이를 기반으로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교회가 세워지고, 이는 곧 근대 과학의 기틀이 되고 근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읽기가 혁명이 될 수 있는 이유"그는 읽으라는 말을 듣고 읽었고, 쓰라는 말을 듣고 썼으며, 그리고 시를 읊은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납니다." (본문 139쪽)
저자에 따르면 문학은 곧 혁명의 근원이다. 여기에서 문학은 어떤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의미있는 텍스트를 읽고, 글을 쓰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이 문학이며, 혁명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해석하며 고쳐 읽는다는 것이며,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다시 쓴다는 것이다.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곧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처럼 혁명은 읽고 쓰고 변혁시키는 것이다.
읽기가 혁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읽음으로써 독자는 더 이상 이전의 삶에 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이제껏 내 삶의 허위에 격렬히 도전한다.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읽고 있는 자신과 세계가 동시에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며, '책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가'를 묻고 시험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책 읽기가 혁명이 되지는 않는다. 치열한 책 읽기가 꺾을 첫 번째 대상은 언제나 내 자신이다. 저자는 '책을 읽고 말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과감히 그것에 굴복시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학문에 종사하는 숱한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로만 배설하는 '교양인'으로 전락했지만, 저자는 니체를 통해 그 모순을 극복한다. 텍스트로 하여금 내 무지를 드러내어 먼저 내 삶을 변혁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의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본문 34쪽)책 읽는 시간은 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