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매 견해 갈라놓은 1980년 광주학살

김용옥 수필집 <살아야 하는 슬픈 이유>를 읽고

등록 2013.05.11 16:09수정 2013.05.1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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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인생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사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목숨에 대한 또는 삶에 대한 폭력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인내하기 지독한, 견뎌내기에 치가 떨리는 폭력이다. 내 인생에 가장 혹독한 폭력은, 빌어먹을, 나의 조국으로부터 왔다." (김용옥 시인 수필집 <살아야하는 슬픈 이유> 12쪽에서)  

 김용옥 시인 수필집 <살아야 하는 슬픈 이유> 표지
김용옥 시인 수필집 <살아야 하는 슬픈 이유> 표지 조종안
김용옥(66) 시인은 2005년부터 틈틈이 써온 글을 여섯 마당으로 묶은 <살아야 하는 슬픈 이유>의 첫 번째 수필(<비겁한 죄>) 서두에서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조국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처음엔 '어떤 폭력이었기에··' 하는 생각과 함께 고개가 갸웃거려졌으나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김 시인은 중학교 1학년 때 4·19 학생민주화운동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어렴풋이나마 추구할 이념이 뭔가를 배웠다. 대학 시절에는 유신독재를 반대하는 데모에 동참하며 민중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를 꿈꾸었다. 젊어서 이상에 미치지 않으면 지성인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그러다가 군사정권으로부터 직격탄을 맞는다.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던 하나뿐인 오빠가 간첩 누명을 쓰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

온 가족이 백방으로 나서 일주일 만에 찾아낸 오빠는 모진 고문과 폭력으로 형용키 어려운 몰골로 둔갑해 있었다. 고문경찰관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한 마리 늑대에 지나지 않았다. 오빠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는 동안 어머니의 애간장과 함께 가산은 탕진되어 갔다. 여동생이 넣어주는 책조차 철저히 조사받던 당시 김 시인의 심정은 그야말로 '끔찍했다'였다. 

오빠는 결국 무죄석방 되었다. 그러나 사회인으로는 이미 반신불수나 다름없었다. 훤칠한 청년(오빠)의 외면과 내장은 푸석푸석 삭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오빠는 반벙어리가 되었다. 억울하고 원통했다. 김 시인은 독일 신부의 증언과 외신기자들의 보도를 접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살았다. 눈도 감았다.

 광주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이 강경진압에 대한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며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광주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이 강경진압에 대한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며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오빠가 어렵게 사업을 시작하던 1979년 가을, 18년 장기집권하던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부하에게 저격당하는 10·26 사건이 터졌다. 이어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가 이듬해 5월 빛고을 광주에서 양민을 상대로 무자비한 대학살극을 자행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잔혹한 학살은 국민의 불행은 물론 세계만방에 창피스러운 일이었다. 

"이 땅에는 역사의 정통성이 없고 진정한 역사의 정리도 없다. 비겁하거나 영악한 지식인들은 입 다물고, 총검으로 비참하고 원통하게 죽어간 자는 영영 말을 못하고 그들을 애간장에 끌어들인 민초들은 싸우며 외치며 한을 품고 증언해도 제대로 들어주는 귀가 없다. 폭폭한지고! 군사정권이 이어지는 동안 나의 공포는 발작처럼 되살아났고, 전라도 사람인 나도 낮말도 밤말도 글도 조심해야 했다."(같은 책 15쪽)


그랬다. 당시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전무한 시대였다. 공정하고 진실한 정보 전달이 사명인 신문과 방송은 잘 길들인 강아지처럼 학살을 자행한 신군부에 충성하면서 민주투사들을 향해서는 선동자, 빨갱이라 부르댔다. 권력자들은 어용 언론을 앞세워 철들지 않은 사람에게는 속으라고 다그치고, 지식인들에게는 비겁해지라고 윽박질렀다.

김 시인은 5·18 민주항쟁이 북한 빨갱이에 부화뇌동 당한 광주 시민의 국군테러로 둔갑하여 토막토막 보도된 사흘 후,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가 저지되고, 한 달 후 달려간 광주 금남로 거리 시멘트블록에 즐비한 검붉은 핏자국을 보며 울었다. 그는 문명화됐다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참혹한 집단테러는 캄보디아 폴포트 학살사건보다 더 소름 끼치는 공포였다고 회고한다.


 휠체어에 의지한 참배객이 군홧발에 짓밟힌 임신부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휠체어에 의지한 참배객이 군홧발에 짓밟힌 임신부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조종안

망월동에 5·18 묘소가 만들어지자 김 시인은 황토흙먼지 풀풀 마시며 한걸음에 달려갔다. 유복자로 낳은 아기를 품에 안고 넋 나간 청상의 통곡과 생때같은 청춘의 아들을 잃은 중년 아낙네의 분노에 찬 통곡이 명곡인 양 뇌리와 가슴에 박혔다. 그래도 말할 수 있는 상대는 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고, 이불을 함께 덮고 지내는 언니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김용옥 시인은 전주 남자, 언니 둘은 안동 남자, 포항 남자를 만나 살면서 대한민국 정치·경제에 대한 견해뿐 아니라 5·18 민주항쟁의 진상과 진실을 판단하는 식견도 영 딴판이 됐다. 경상도 남자들 아내가 된 언니들에게 김 시인은 소위 좌파 기질의 불평분자에 지나지 않았다. 엄연한 학살임에도 언니들은 '사람으로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며 오불관언. 남북분단보다 더 괴기한 세 자매의 갈라진 견해는 답답한 세월과 함께 30년이 흘러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은 현대사 자료로는 처음으로 2011년 5월 25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에서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공식 발표했다. 당시 극우세력이 북한군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여전히 북한군 소행이라며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내란죄와 반란죄 등으로 법정에 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내란죄와 반란죄 등으로 법정에 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5·18기념재단

5·18 광주학살 만행의 책임자 전두환은 16년 전 대법원에서 내란죄와 반란죄, 내란목적 살인죄 및 상관살해 미수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그는 또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전 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다며 추징금 1672억 원을 납부하지 않고 버티는 파렴치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매년 7억 원의 국민 혈세를 경호비로 낭비하고 있으니 이는 또 무슨 조화인가. 

푸릇한 청춘이 겪어야 했던 고뇌가 엿보이는 <비겁한 죄>. 수필을 읽는 내내 가슴 한편이 아렸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군사독재정권에 처참하게 당한 피해자 가족의 절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셋으로 갈라진 자매들 견해는 언제나 하나로 모아지고, 지하에 묻힌 진실은 언제나 햇빛을 보게 될지, 왜곡된 역사는 언제나 바로 잡힐지···. 오호 통재라!
덧붙이는 글 김용옥 시인은 1980년 <전북문학>으로 등단, 4권의 시집과 6권의 수필집을 냈다. 현대시인협회 중앙위원이며, '전북문학상', '신곡문학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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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시인 #5·18 민주항쟁 #살아야하는 슬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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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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