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캔버스에 유화, 38×46cm, 1890~1891,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은 성속(聖俗)이 하나로 합쳐진 종합주의 화풍의 작품 중 하나다. ⓒ Musee d'Orsay, Paris, France
김형순
1882년 파리증권거래소가 파탄 나면서 고갱은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로 접어든다. 이후 예술가적 기질 때문에 그의 생애는 평탄치 않았다. 결혼생활도 풍파를 겪었고, 주변 사람과의 충돌도 잦았다. 개성과 주관성을 중시한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 고갱. 원초적 생명 세계에 대한 동경은 그를 창작에 몰두하게 했다.
고갱의 미술사적 위상이라면 인상파를 마감하는 '종합(상징)주의'와 원초적 생명력과 순수한 본능을 추구하는 '원시주의'를 통해 최초의 근대 화가가 됐다는 점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보나르의 나비파, 마티스의 야수파, 피카소의 입체파, 뭉크의 화풍, 독일의 표현주의가 출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갱은 1888년 동료화가 슈페네커에게 "이 세상에서 우리를 달래주는 건 자신에 대한 신념과 내 능력에 대한 믿음뿐"이라고 털어놨다. 이 맥락을 보면 그는 예술가를 신과 대등한 창조자로 봤다. 그만큼 자신의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 하지만 비평가나 대중은 그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다. 고갱은 이를 안타까워했다.
피사로의 영향 속 습작 그렸던 퐁투아즈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