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플러스에서 방영 중인 <진격의 거인> 포스터
애니플러스
몇 달 전 아내가 볼 만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단적으로 <공각기동대>와 <에반게리온> 급이라고 했다. 귀가 솔깃했다. 시간을 쪼개서 오랜만에 시리즈물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미 국내에서도 매체와 SNS에서는 '진격의 OO'이 무슨 유행어처럼 번져 있었고 몇몇 온라인 매체나 블로거들도 이 애니메이션의 무게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 <진격의 거인>에 입문했을 때 나는 이 애니메이션이 비교적 단순하고 굵은 내러티브라고 생각했다. 정작 빠져드는 요소는 내러티브 외적인 요소로 보였다. 이를테면 시작부터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이라거나, 대영웅 없이 그저 어리고 겁이 많은, 때론 용감하나 실력이 모자란 류의 어린 소영웅들이 압도적 힘의 열세에도 거인에게 맞서는 긴박감이 스릴 있게 다가왔다.
게다가 만화책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영상의 완성도도 높았다. 마지막으로 주인공 남성(에렌 예거)보다 여성(미카사 아커만)이 더 뛰어난 전사로 설정된 부분도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진격의 거인>의 가장 큰 묘미는 무엇보다도 거인의 스케일과 잔인함에 기인한 공포,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일단 거인이 벽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대다수의 인간은 죽는다. 숙련된 '조사병단'조차 거인과의 맞대결에서 결코 이길 수가 없다.
거인이 사람을 먹어치우는 특별한 이유조차 없다. 무심한 듯 무표정으로 사람을 두 동강 내고 피가 쏟아지게 만드는데도, 자신의 행위(인육을 먹는)에 대해 마치 인지하지 못하는 듯한 거인의 덤덤함에서 오는 공포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죽음은 친분을 피해가지 않는다. 첫회엔 주인공의 어머니가 죽어버리고 각 에피소드마다 비중이 있다고 생각된 인물들조차 '찢겨짐'을 피해가지 못한다.
처음 이 애니메이션이 알려졌을 때, 일본의 상황과 맞물려 일본 우경화의 코드로 독해하곤 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일본의 정치적 상황도 그렇고, 방사능 오염 위험에 관하여 어느 일본 교수의 경고글이라고 알려진 글이 SNS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는 분위기와 맞물려, 이 애니메이션은 마치 일본의 보수 회귀 방향의 스탠스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흥미진진한 내러티브... 단정적 비평 미뤄두고 '미완의 서사' 즐기자 그러한 관점으로 볼 때 거인의 존재는 '공포'라는 말로 대변되는 현재 일본이 직면한 모든 위험요소의 은유이고, 인간과 거인 사이의 '벽'은 패전 이후의 국제 정세로 대변되는, 오랜 세월 일본의 발을 묶어둔 구태의연한 그들의 시대정신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은유적 코드로 해석한 이 내러티브는, 후기근대 사회가 국가 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냉혹한 '야만의 시대'이므로, 열도 안에 가축처럼 갖혀 살다가 몰락(몰살 혹은 침몰)당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그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따라서 그저 주저앉아 운명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침략'하고 '살육'하는, 본원적 먹이사슬에 충실한 삶을 개인과 국가 모두 추구해야 한다는 방향으로의 독해 또한 가능해진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우리도 일본의 현실과 맞물려서 거인과 인간의 싸움이라는 내러티브에서 일본이라는 현실국가를 자꾸 스토리라인에 대치(代置)시키려는 유혹에 빠지는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섣부른 해석은 잠시 접어두면 좋겠다. 이 미완의 서사는 회를 더해갈 수록 변화하고 있다. '공포'라는 코드로만 읽히던 굵직한 내러티브는 46화(만화 기준)를 달리는 지금 더욱더 진화하고 있다. 일례로, 처음 인간이 견고히 쌓은 벽을 허문 거대 거인은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 즉 인간 중의 한 세력인 것으로 드러난다.
주인공인 에렌도 거대거인으로 변할 수 있으며, 거인의 공격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주던 벽들 안에는 거인이 숨겨져 있었다! 벽이 뚫려서 쳐들어온 줄로만 알았던 거인들은 인간의 마을 내부로부터 '생성'되었음도 암시된다. 처음에 확신했던 일본의 현실과 매칭되던 코드들은 점차 분해되고 서사는 미완의 영역으로 비약한다.
이 흥미진진한 내러티브는 어떤 결말로 치달을 것인가. 보수의 코드로 대변되는 '공포'의 은유가 확장될 것인가, 아니면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인간세계의 복잡한 권력구도에 관한 프렉탈들을 마치 모세혈관처럼 디테일하게 보여줄 것인가. 오랜만에 <에반게리온>을 잇는 일본 애니메이션 대작 앞에 행복한 상상에 빠져본다. 고로, 우리들의 단정적인 비평은 잠시 미뤄두고 현란한 줄타기의 액션 속 '미완의 서사'를 그저 즐기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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