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더불어 사는 길

감상 혹은 풍경 14 - 숙지원의 7월

등록 2013.07.10 10:02수정 2013.07.1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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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기화요초가 가득한 정원도 여름 몇 달만 방치하면 쑥대밭이 되고 화려하고 장엄한 궁전도 몇 년만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폐허가 되고 만다. 작은 텃밭과 정원도 마찬가지다. 며칠만 손을 놓으면 풀과 나무는 제멋대로 자라고 잔디밭의 잡초들은 활기를 띈다. 특히 여름은 그 정도가 예상을 넘기에 그래서 텃밭을 일구고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에게는 방심할 수 없는 계절이다.


숙지원 동편은 정광산 줄기에 닿아 있는데 산과 숙지원 사이에는 작은 도랑이 있다.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항상 물이 흐르는 개울이었다는데 지금은 비가 내릴 때나 물이 흐르는 도랑으로 남아 있다. 그래도 도랑에는 습기가 많아 풀은 잘 자라는데 문제는 산에서 내려온 토사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도랑이 메워진다는 점이다. 그대로 두면 장마철에 많은 비가 내리는 경우 숙지원 안쪽으로 물이 밀려들 수 있기 때문에 2년 터울로 장마가 오기 전 도랑치기를 한다.

도랑의 길이는 약 80m인데 작은 포크레인도 들어갈 수 없어 순전히 사람의 힘 아니고는 해볼 수 없는 곳이다. 그런 도랑 주변 풀을 베고 괭이로 바닥을 파낸 후 삽으로 흙을 쳐올리는 일은 완전한 중노동이다. 금년에는 내 힘으로 감당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하루 인부를 사서 맡겼다.

비비추핀 길                     숙지원의 동쪽 길에 비비추(호스타)가 길을 밝히는 등불처럼 늘어섰다.
비비추핀 길 숙지원의 동쪽 길에 비비추(호스타)가 길을 밝히는 등불처럼 늘어섰다. 홍광석

또 두 손으로 움직이는 전정가위를 다루는 일도 쉽게 보이지만 조경사들을 흉내내어 두 시간만 계속 전정가위를 철컥거리고 나면 등에 땀은 기본이요, 오랜 시간 계속하면 양팔의 힘이 빠져 덜덜거리기까지 한다. 며칠간에 걸쳐 혼자 철쭉 등 정원수의 전정을 마쳤다.

그리고 예초기를 지고 풀을 베는 일도 위험 부담이 큰일이다. 잔디밭은 보통 잔디 깎는 기계를 이용하지만 잔디의 뿌리가 썩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1년에 한 번쯤 잔디를 뿌리까지 깊게 깎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일은 예초기로 하는데 우선 예초기를 두 시간만 지고 다니면 팔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하고 아파진다. 더구나 예초기에서 나오는 매연과 예초기 날이 스친 땅에 나는 먼지도 고약하고 가끔은 튀는 돌이 얼굴을 따끔하게 때리기도 한다.

보통 사람이 그렇게 반나절을 하고 나면 식사 때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기도 어려운 정도가 되고 만다. 사람을 사서 시켰으면 좋겠지만 인건비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잔디밭을 어림잡아 분할한 후 틈나는 대로 며칠간에 걸쳐 예초기를 돌리고 있었는데 일을 끝내기 전에 장맛비가 시작했다. 아무튼 도랑치기, 나무 전정, 예초기 작업은 정원을 유지하는 기초적인 일이면서 중요한 일이다. 또 그런 일은 아내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때문에 인부를 사거나 아니면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백일홍         백일홍은 다양한 색상의 꽃이 오랫동안 핀다.
백일홍 백일홍은 다양한 색상의 꽃이 오랫동안 핀다. 홍광석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사람이 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과정이 있듯이 아무리 귀한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새싹이 돋고 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은 문자 그대로 기쁨을 주지만 꽃이 진 마른 꽃대를 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내가 삽과 괭이를 들고 있는 시간에 아내는 호미를 잡고 꽃양귀비와 수레국화의 마른 줄기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백일홍과 키가 작은 데이지 종류를 옮겨 메우고 사이사이 풀을 매주는 일을 한다.

꽃피는 시기에 꽃의 모종을 옮기고 풀을 매는 데는 호미를 따를 농기구는 없을 것이다. 꽃밭의 꽃들은 때가 오면 절로 핀다. 하지만 스스로 원하는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숙지원의 다양한 꽃들은 아내의 호미 끝에서 핀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금사매        여름내 노란 꽃이 지치지 않고 피어 좋아한다.
금사매 여름내 노란 꽃이 지치지 않고 피어 좋아한다. 홍광석

사실 삽으로 꽃밭의 풀을 매기 어렵고 호미로 도랑을 칠 수 없듯이 삽과 호미가 하는 일은 차이가 있다. 사람에도 개인의 특성과 자질에 맞는 쓰임새가 있듯이 농기구도 그 쓰임새가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아내와 내가 다루는 농기구가 같지 않고 또 하는 일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의 목표조차 다른 것은 아니다. 소박하면서도 편안한 숙지원 만들기! 그런 목표를 위해 단정하고 깨끗한 정원을 다듬는 노력을 하는데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아내와 나의 분업과 협동이 정착된 셈이다.

7월. 감자 캐기, 메주콩 심기, 강낭콩 수확, 철쭉 전정, 도랑치기 등 어렵고 힘든 일은 끝났다. 요즘은 한낮에 전정가위나 삽을 잡을 일은 거의 없다. 짧은 여름 농한기를 맞은 셈이다. 그러나 아직도 잔디 깎기는 예닐곱 번을 더 해야 가을이 올 것이다. 국화가 피기까지 아내는 시든 꽃들이 남긴 마른 줄기를 치우고 계절에 맞는 꽃모종을 옮기는 일을 더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날이 넓은 괭이로 골이 넓은 이랑의 풀을 잡고, 아내는 호미로 직접 작물을 감고도는 풀을 뽑는 분업과 협동은 쉬엄쉬엄 가을까지 계속 될 것이다.

채송화        키가 작은 꽃, 아침에 피었다가 한 낮이면 날개를 접는 꽃이다.
채송화 키가 작은 꽃, 아침에 피었다가 한 낮이면 날개를 접는 꽃이다.홍광석

장마철이다. 졸지에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진다. 잠시 비 갠 틈을 골라 숙지원을 돌아본다. 색색의 채송화, 키는 작지만 빛깔이 고운 무지개데이지, 리빙스턴데이지, 노란 멜란포디움, 노란 금사매, 보랏빛 프록스, 하얀 담배꽃, 그리고 아내에게 들었지만 이름을 잊은 꽃들…. 사진을 찍고 각각의 꽃에 얽힌 이야기를 하며 금년에 심었던 꽃들의 공간 배치가 적절했는지 반성하고 내년에는 키와 색상을 고려하여 심어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많은 비가 내렸음에도 미리 도랑을 친 탓에 도랑에서 쳐올린 흙이 제방 구실을 톡톡히 하여 큰비에도 산에서 내린 물은 숙지원 안쪽으로 달려들지 않았다. 돈 들여서라도 끝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예초기에 부리를 드러냈던 잔디밭은 장맛비에 생기를 되찾고 있다. 아마 내년까지는 예초기로 밀지 않아도 건강하게 자랄 것이다.

고추밭에는 비바람에 줄기가 부러진 고추가 보인다. 아무리 묶었다고 하지만 바람의 힘과 비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는가 보다. 그런 줄기는 훑어 고추는 된장에 찍어먹거나 양념으로 쓰고 고춧잎은 데치면 훌륭한 나물이 된다. 감고 오른 줄기를 헤치니 자란 오이가 보인다. 익은 토마토도 있다. 먹을 만큼 자란 가지도 눈에 띈다. 아마 산 비탈에 심어놓은 호박도 풋풋하게 주먹만큼 자랐을 것이다.

집 뒤에 상추 부추 신선초 등 채소를 심는 채전을 따로 두고, 앞 텃밭과 비닐하우스 안에는 각종 여름 채소를 심었는데 잘 자라고 있다. 한 끼니에 신선한 반찬 한두 가지를 밥상에 올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오이를 찾고 가지를 따는 익은 토마토를 수확하는 일은 아내와 같이 한다. 작은 기쁨일지라도 함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독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장독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장독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장독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홍광석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뜻이 없으면 누리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일이다. 지치지 않는 생명의 찬가를 듣는 일이다. 낙원을 꿈꾸는 숱한 영혼을 만나는 일이다.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조합할 수 없는 색을 보고, 그릴 수 없는 환상적인 그림을 만나는 일이다. 또 적절한 시간에 자신을 감추고 다음 꽃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꽃들을 보며 겸양과 배려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부부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나란히 가는 길이다. 이 계절에, 떠나온 고향이 그립다면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한 번쯤 낮에는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한 뻐꾸기가 길을 묻고 밤이면 개구리가 합창하는 고향 땅을 돌아보면 어떨까? 권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겨레 필통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비비추 #백일홍 #금사매 #채송화 #장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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