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이 때문에 비참해지는 생활인의 비애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41] <생활>

등록 2013.07.10 18:24수정 2013.07.1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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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거리의 먼지 나는 길옆의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 멍석의
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처럼
솟아오른 놈


(유년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나)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웃는다

무위(無爲)와 생활의 극점(極點)을 돌아서
나는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

생활은 고절(孤節)이며
비애이었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조용히 조용히……
(1959)

김수영 선생님, 오늘은 <생활>이라는 제목의 시를 읽습니다. 며칠 전, 학교에서 별로 유쾌하지 않은 말을 들었습니다. 마흔을 훌쩍 넘은 저에게는 아직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 어린 자식이 둘이나 됩니다. 큰애는 초등학생이라 그럭저럭 잘 지냅니다. 그런데 이 두 녀석은 아직 어린지라, 밤중에 갑작스레 열이 나거나 해서 몸이 좋지 않을 때가 잦습니다. 채 두 돌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어린이집에 등교(?)해야 하는 막내가 특히 더 그렇지요. 이번 학기에 저는 그렇게 아이들이 갑작스레 몸이 안 좋아지면,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병원에 들렀다 출근하곤 했습니다. 아내가 저보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었지요.


아픈 아이때문에 늦게 출근한 것, 지적받으면 서러워

그런데 학교 한 선생님에게 그런 식으로 학교에 늦게 출근하는 건 문제가 아니냐는 말을 슬며시 흘려냈나 봅니다. 출근 지각이니 근무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학년 초 인사 결정 과정에서 아이들로 인해 생길 불가피한 사정도 말씀드렸던 터라 '서러움'이 더욱 컸습니다. 문득 아무 데고 하소연할 데 없는 제 자신이, 그런 저의 삶이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날 저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였습니다.


선생님, 우리 스스로 비루하다고 느끼는 일상은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지요. 평범한 일상인인 제가 이럴진대 선생님처럼 시를 쓰는 '예민한' 분들에게야 오죽하겠습니까. 이 시의 화자가 "길 옆의 /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1연 1, 2행)이 많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1연 4행)온 까닭도 이와 관련되지 않았을는지요. 저는 화자의 이 웃음에서, 비루한 일상을 혐오하면서도 그것에 얽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냉소와 자조로 일상을 간신히 버텨 나갔을 선생님의 안타까운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더불어 바로 며칠 전에 울컥했던 저의 모습까지도….

선생님께서,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4연 1행) 거리를 걸으며 "허허 … 웃는"(4연 3행) 화자를 '낙오자'로 그린 까닭도 여기에 있었겠지요. 삶에 얽매일수록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2연 1, 2행)에 압도되기 마련인 게 일상인들이지요.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비루하지만, 결코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일상을 살아보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생활의 깊은 수렁으로 점점 더 빨려 들어갑니다. "생활의 극점"(5연 1행)으로 표현한 지점이 바로 그 경지(?)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무엇이 이토록 화자를, 그리고 선생님을 괴롭혔을까요. 6·25 한국전쟁의 후폭풍이었을까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동족상잔이라는 전무후무한 대참사를 겪은 우리 민족에게 삶은 말 그대로의 삶이 아니었겠지요. 동물적인 생존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까요. 그래서 저는, "생활은 고절(孤節)이며 / 비애(悲哀)"(6연 1, 2행)였다며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6연 3행)고 울부짖는 화자를 떠올리며 비통한 심정을 감출 길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바로 그런 상황이었겠지요.

그런데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정녕 '고절'이며 '비애'였던 '생활' 때문에만 '미쳐간'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과 같은 서민들의 피폐한 삶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권과 권력 유지에만 몰두해 있던 당시 정치 모리배들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1960년의 3·15 정·부통령 선거를 위해 이 해 봄부터 부정 선거 공작이 차근차근 기획되고 있었던 상황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당시의 억압적인 언론 환경 탓에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3·15 부정 선거를 위한 공작의 첫 단추는 이미 1959년 3월부터 끼워졌습니다. 이승만 정부가 내무장관과 법무장관 등 6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6인 위원회를 조직한 것이 그것이었지요. 이 조직은 선거와 관련된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 사항과 공무원 선거 대책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6인 위원회는 3·15 부정 선거를 위한 공공연한 아지트 같은 곳이었지요.

이승만이 자신의 충복인 최인규를 42세의 젊은 나이에 내무장관으로 임명한 것도 그 부정 선거 공작 사업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취임사에서 이승만 대통령 각하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며 공무원들에게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가 35세의 이강학을 치안국장으로 임명하는 등 경찰 인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1959년 5월에 7개 도지사를 바꾼 것도 선거 체제 준비를 위한 기획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렇게 선거 정국의 최일선에 나선 최인규는 1959년 11월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 부정 선거를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사전에 기획된 공작을 착착 진행합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임명한 치안국장 이강학을 데리고 각 시·도를 다니면서 경찰국장 및 사찰과장, 경찰서장, 시장, 군수, 구청장 등을 소집한 뒤 다음과 같이 역설했습니다.

공무원선거운동이 위법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처벌하지 않겠고, 징역을 살아도 내가 살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유당 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 [서중석(2007), <한국현대사 60년>에서]

선생님, 저는 이토록 '당당한' 최인규에게서 지금 2013년의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태풍의 눈이 되고 있는 두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이 나라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국정원)의 전·현직 원장인 원세훈과 남재준 두 사람이 바로 그들입니다.

원 전 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2009년 3월에 국정원장으로 임명된 후 국정원 심리전단을 독립부서로 확대 개편하고, 같은 해 5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원장님 지시, 강조 말씀" 등을 통해 여론 조작을 시도했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보위와 작년 말 치러진 대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겠지요. 하지만 지금 국정원은 그것이 대북심리전 차원의 활동이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올해 3월에 현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남재준 국정원장은, 휘하의 조직이 불법적인 정치 개입 혐의로 궁지에 몰리자 법으로 엄금한 전임 대통령의 정상회담 기록물을 전격적으로 공개했습니다. 그 기록물의 보안 등급을 임의로 낮춰 가면서 말이지요. 선생님께서는 처음 들으시는 말일 텐데, 이는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입니다. 비판이 거세지가 그는 기록물 공개가 국정원 조직의 명예와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선생님, 1959년의 최인규와 2013년의 원세훈, 남재준 등이 공통으로 중시한 게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마 이들은 겉으로는 국가와 민족을 뇌까리고, 법과 원칙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속으로도 정말 그랬을까요.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만, 실제 그들의 머릿속에는 국가 최고 권력자의 뜻을 따르는 일이 그 어떤 나라 사랑보다 숭고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권력을 보위하는 일이 곧 국가와 민족의 안정과 평화였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생활의 최전선에서 "조용히 미쳐"가는 평범하고 국민의 비루한 일상이 눈에 들어왔을는지요.

만약 선생님께서 2013년의 대한민국으로 오신다면...

선생님, 저는 지금 정말 무서운 게 많습니다. 저를 비참하게 한 어떤 학교 당국자의 말이 무섭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잡기 위해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이 나라의 국가 기관들이 또한 무섭습니다. 그런 이 나라 '슈퍼 갑'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정치란 원래 그런 거야. 그게 무서우면 출세해서 권력을 잡아야지.' 하는 투로 냉소하는 비루한 생활인들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위(無爲)와 생활의 극점(極點)을"(5연 1행) 지나,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5연 2, 3행)가는 역설을 통해 어두운 현실을 이겨내려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토록 비루한 일상을 욕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저를 보신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만약 선생님께서 2013년의 대한민국으로 오신다면, 지금 이 나라를 휘감고 있는 이 거대한 허위의 사슬을 끊어버리기 위해 선생님께서는 과연 어떤 일을 하실까요.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생활>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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