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가짜 평화' 속에 살고 있진 않습니까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44] <하······ 그림자가 없다>

등록 2013.07.17 14:57수정 2013.07.1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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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러스(미국 영화배우)나 리처드 위드마크(미국 영화배우)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리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됭케르크(프랑스 북부의 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유명한 철수 작전이 있었던 곳)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한국전쟁 당시 격전이 벌어진 곳)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 혈투>(존 스터지스 감독이 연출한 1959년 작 서부영화) 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 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시에도
사이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그림자가 없다

하…… 그렇다……
하…… 그렇지……
아암 그렇구 말구…… 그렇지 그래……

응응…… 응…… 뭐?
아 그래…… 그래 그래.
(1960년 4월 3일, 시 <하…… 그림자가 없다> 전문)


김수영은 혁명을 예견한 걸까


선생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 아침에 선생님의 시 <하······ 그림자가 없다>를 읽습니다. 이 시 제목에 있는 '그림자'는 바로 '적'의 것입니다. 한데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에 맞서 싸우는 '우리'로서는 절망과 공포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을 느낍니다. 거대한 물결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누군지도 모를 '적'을 상대하는 '우리들'의 끝없는 싸움을 통해 주저하지 않고 밀려오고 있는 광경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에서 4·19 혁명의 그 떨리는 순간을 느낍니다.

이 시가 지어진 것도 1960년 4월 3일입니다. 그야말로 혁명이 코앞인 때입니다. 그래서 이 시를 보면 선생님께서 마치 그 4월의 혁명을 예견하기라도 하신 듯한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2연 1행)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3연 15행)고 강조하십니다. 아마 선생님께서는 쉬지 않고서는, 모두가 함께 싸우지 않고서는 '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셨겠지요. 그런데 불과 보름 후에 혁명이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시를 통해 '선동'이 제대로 먹혀들었던 것일까요.

선생님, 저는 이 시에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 필요한 '지혜' 가지를 읽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이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때와 곳을 가리지 않은 채 쉬지 않고 이어져야 한다는 것 들이 그것입니다. 세상이 시끄러울 때, '커크 더글라스'와 같은 '사나운 악한(惡漢)'을 '적'으로 만들어내는 방식은 얼마나 편리한지요. 학교 폭력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폭력 가해학생은 순식간에 파렴치하고 패륜적이며 반인륜적인 '괴물' 취급을 받습니다. 각종 범죄로 민심이 흉흉해지면, 본보기로 삼을 만한 흉악범을 '마녀 사냥'의 제물로 내세웁니다.

그 인면수심의 '괴물'과 '마녀'들의 '힘'은 엄청납니다. 그들 덕분에 학교 폭력을 유발하는 폭력 학교와 폭력 교육의 시스템은 은폐됩니다. 수많은 범죄자를 양산하는 불평등 구조와 부의 편재를 심화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악도 가립니다. '괴물'과 '마녀'들을 향해 내지르는 우리들의 질타와 분노는 우리 자신을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점에 놓으면서 심리적 위안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하여 '괴물'과 '마녀'들을 대상으로 한 카니발이 끝났을 때 세상에는 가짜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 위장된 평화 속에서 우리는 지상 최대의 과제인 밥벌이를 하고, 지배자들은 그런 우리를 거만하기 짝이 없는 눈초리로 바라보겠지요.

진짜 '적'은 바로 우리 옆에 있기도


하지만 선생님, 선생님 말씀마따나 '적'은 결코 그런 '괴물'과 '마녀'들만이 아닙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 요리집엘 들어가고 /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1연 9~13행)는 소시민들이 바로 우리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싸움이 어떠해야겠습니까.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을 할 때도 /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를 할 때도 /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3연 5~7행)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3연 12행) 싸우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우리의 '적'이, 우리가 진정으로 맞서 싸워야 할 진짜 '괴물'과 '마녀'가, 우리를 한입에 잡아먹을 것이겠기게 말입니다.

선생님, 이즈음 한 야당의원이 대통령을 향해 '귀태'(鬼胎·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 발언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통령과 여당이 아주 강경하게 반발하면서 파문이 커졌습니다. 저 또한 그 '귀태' 발언이 결과적으로 대통령 한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얕은 수였다는 점에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실상 '귀태'의 진짜 주인은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국가정보원의 정치 공작과 전직 대통령을 부관참시하는 패륜적인 전술을 동원해 대권을 움켜 준 집권 여당 세력 전체가 되어야겠기에 말입니다. 예의 야당의원이 '귀태'를 통해 전하려고 했던 진짜 취지도 여기에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귀태'라는 말의 선정성에 이끌려 결국 박근혜 대통령 '한 사람'만을 주목하게 돼버렸습니다. 결국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침묵을 깬 채 강경 주문을 요구하고, 야당은 우왕좌왕하게 되는 안타까운 역전극이 펼쳐지게 됐지요. 저는 그사이 많은 이가 '귀태'라는 말로 박근혜 대통령을 조롱할 때, 국정원의 정치 공작 사건이 분명 사람들의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대통령을 향한 조롱이나 냉소 한 마디보다 광장에서 치켜든 촛불이 더 소중함을 깨닫는 게 갈수록 어려워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선생님, 밀라이(Milai) 학살 사건을 들어보셨는지요. 1968년 3월 16일, 그 밀라이 마을에서 미 육군 11보병여단 1대대 1소대(소대장 윌리엄 캘리 중위)는 단 하룻만에 최소 347명, 최대 504명의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합니다. 비공식 자료에서는 임산부 17명, 6세 미만의 어린이 173명이 사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아기를 표적판 삼아 사격 연습을 한 미군도 있었다고 합니다. 밀라이 학살은 "살아 있는 건 병아리뿐"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철저한 '인간 사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학살 현장 근처를 비행하던 수색정찰 헬기 한 대가 있었습니다. 같은 미 육군의 휴 톰슨 중위가 몰던 헬기였습니다. 공중에서 학살 현장을 내려다 본 톰슨 준위는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는 헬기에서 내리기 전 자신의 기관총 사수 로렌스 글렌 안드레오타에게 여차하면 아군들을 향해 발포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학살의 주범들인 캘리 소대원과 대치하게 된 그 긴박한 상황에서 톰슨 준위는, 무전을 받고 뒤늦게 출동한 또 다른 두 대의 헬기 대원들과 함께 부상당한 베트남 민간인 10여 명을 구출해냅니다. 구출자 중에는 도랑 속 어머니 품속에 있던 두 살배기 아이도 있었습니다.

'루시퍼'를 이겨낸 진짜 영웅들

선생님, 흔히 평범 속의 악은 '루시퍼(Luciper) 효과'를 통해 설명된다고 합니다. 캘리 중위는 "우리는 전쟁 동안 공산주의자들이 인간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루시퍼의 하수인으로 보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겠지요. 하지만 루시퍼의 사악한 조종을 이겨낸 예 또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군과 대치하는 위험을 무릅쓴 톰슨 준위와 그 부하들이 바로 그 사례겠지요.

훗날 톰슨 준위는 무공훈장을 받고, 미 육군의 모든 장교 후보생이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영웅적인 군인의 사례로 추앙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가 톰슨 준위가 한 것과 같은 '영웅적인 행적'을 통해서만 '루시퍼 효과'의 자장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대일 항쟁에 헌신한 무명의 독립 투사들, 폭압적인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4·19 혁명과 5·18 민주화 운동의 학생과 시민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아닐런지요.

선생님, 오늘 17일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공화국임을 만천하에 공표하고 있는 헌법이 만들어진 날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죽어가고 있다며 "민주주의를 살려내라"고 외치는 수만의 시민들이 있습니다. 저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촛불을 치켜든 그 평범한 시민들이야말로 각자의 가슴 속에 있는 사악한 '루시퍼'를 이겨낸 진짜 영웅임을 믿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 그림자가 없다>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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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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