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버스 문화제 마지막에 참가자들은 박준 노동가수의 '노동은'을 합창했다.
문주현
20일부터 무박 2일로 진행된 현대차 희망버스의 백미는 현대차 희망버스 문화제였다. 2시간 이상 진행된 문화제는 최병승·천의봉 하청노동자가 280여 일 철탑농성을 벌이고 있는 명촌주차장에서 열렸다.
멀리 일본 오사카의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7년째 주민들을 이간질하며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는 제주해군기지 건설 예정지 강정마을 주민, 수십 년 일궈온 땅에 송전탑이 무단으로 들어와 고통 받고 있는 밀양 할매들, 경찰의 폭력진압에 가족을 잃은 용산참사 유가족, 쌍용차 해고노동자 등 이 땅에서 고통 받고 착취 받은 이들이 철탑 앞에 모여 서로 힘과 용기를 공유했다.
"밀양 할매들의 논과 밭을 강탈하고 송전탑을 짓는 것처럼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강탈하는 것.""국정원의 정치 개입만이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자리(현대차 송전철탑)에서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탄압하는 것도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것.""우리들의 투쟁과 희생은 더불어 살기 위한 투쟁이다.""노동자의 투쟁은 외롭고 힘들지만 많은 응원과 관심이 있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마음에는 국경이 없다."왜 5000여 명의 시민들이 희망버스에 몸을 실었는지 그 답을 그들은 이렇게 내렸다. 희망버스는 국가와 자본에 의해 강탈당한 이 땅의 비정규직의 외롭고 힘든 싸움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응원이다.
특히 5년 이상을 불법파견 철폐와 사내하청 폐지를 위해 280여 일 철탑 농성을 벌이고 있는 최병승·천의봉 노동자. 그들에게 묵묵히 밥을 올리고, 신변을 보호하며 지키고 있는 현대차 사내하청노동자들, 불법파견에 대한 현대차의 침묵에 10년 동안 항거하고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이들에게 더욱 간절하고 필요한 응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더 이상 이곳에 있는 이유를 찾지 못했었다....어렵게 철탑 농성을 좀 더 하기로 결심한 첫 날, 고 박정식 열사가 돌아가셨다. 영정 앞에 술 한 잔 못 따르는 내가 미웠고, 기억하기 싫은 일들을 잊기 위해 발버둥도 쳤다."10년간 때론 맞기도 하고, 거리에서 밤을 지새워가며 고생을 함께 나눴던 동료의 죽음이 가슴 깊이 새겨지는 순간 만큼 절망적인 순간도 없다.
"희망버스는 절망버스가 아닌 믿음버스.""왜 우리만 슬퍼해야 하나? 스스로 무기력과 야만적 폭력 앞에 주저해야 하나? 죄 없는 노동자가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야 하나?"문화제 마지막에 철탑 위 최병승 하청노동자는 이렇게 절규했다. 왜 이 사회는 불법을 자행하는 현대차에 침묵하고 이에 대항하는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에 불법이라며 경찰을 투입하고 경비용역을 동원하는지. 최병승 하청노동자의 절규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절규는 '희망버스'를 '절망'과 '폭력'으로 표현하는 보수언론들과 대규모 형사처벌을 검토하는 경찰, 희망버스는 기획된 폭력이라고 흥분한 자본가들에 대한 외침이었다. '절망'과 '폭력', 이 두 단어는 10년째 자행되는 현대차의 불법과 이를 묵인하는 사회에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까?
"세상이 미쳐가고 있다. 이 미친 세상을 버티려면 우리 먼저 자책해서는 안 된다. 우리 동지를 죽인 것은 우리가 아니라 사람을 착취하고 불법을 자행한 정몽구다... 열사가 원한 꿈과 희망을 쟁취하자. 나의 정규직 전환이 아닌 모든 사내하청 정규직 전환을 쟁취하자. 동지들 죽지 말고 살아서 승리하자." 최병승 하청노동자의 발언이 끝나고 희망버스 참가자들과 노동자들은 모두 '노동은'을 부르며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날 밤 기사를 다 쓰고, '희망버스'에 관한 기사들을 살펴봤다. '절망버스', '폭력버스'라는 언론들의 비난에 가까운 표현들로 '희망버스'를 폄훼했다.
문화제에서 눈물을 훔치며 서로의 고통을 보듬고 자본과 국가라는 거대한 기관의 탄압에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보수 언론들의 기사를 보고 난 '희망버스'를 '믿음버스'와 '나눔버스'로 새로 이름을 붙이고 싶다. 그들이 보지 못한 눈물을 기록하기에는 '믿음'과 '나눔'처럼 좋은 단어는 없기 때문이다. 이 고독한 현실의 '절망' 앞에서 서로 고통을 나누고, 민중에게 혹독한 삶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