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원 농장의 된장, 간장독
이상옥
같은 된장이고 간장이지만정두화 회장이 담근 된장과 간장쯤 되면말을 하고 웃기도 한다- 이상옥의 디카시 <수진원 농장에서>나도 요즘 시골집 개조에 관심이 생겨 관련 책자를 보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수진원 농장이었다. 무턱대고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찾아간 수진원 농장이 알고 보니 어릴 때부터 익히 들었던 말표구두약 창업주 고 정두화 회장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어서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오늘의 수진원농장은 고 정두화 회장의 탈속적 세계관의 산물이 아닌가 한다. 1970년대 초반 정두화 회장은 군에 납품하던 '말표 구두약'으로 큰 재미를 봤다. 그 시절 그는 잘나가던 회사를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낙향을 결심했다. 그때 나이가 53세(1970년). 한창 부와 명예에 탐닉할 나이건만, 무슨 깨달음이 있어 잘 나가는 회사경영을 접을 마음을 먹었을까.
무릇 사람은 떠나야 할 때를 알아야 하거늘. 오늘, 자신의 자리가 영원한 것인 줄만 알고 눌러앉았다가 낭패를 본 이들이 부지기수다. 권력이나 부·명예의 달콤함에 빠져 정작 내려올 때를 놓쳐서 떠밀려 추하게 되기 십상인, 특히 정치하는 분들은 정두화 회장의 탈속의 정신을 수진원 농장에서 배워야 할 듯하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기에 이 글을 쓰는 것이리라.
공기가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양평, 생전 정두화 회장이 "좋은 장맛을 내려면 공기·물·콩·독(항아리)·솜씨가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과 바로 일치하는 곳이다. 정두화 회장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알만하다. 한창 일하고 사업하는 재미를 만끽할 때 이곳에 터를 닦은 것은 사업을 위한 도시생활 자체가 정두화 회장의 타고난 천분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시골집 개조 배우러 갔다가 느낀 '장맛'생전 수진원농장주로 지면에 인터뷰한 것을 보면, 남은 여생을 장맛에 승부를 건 것이, 일제가 왜간장을 가져와 한국인의 입맛을 바꾸어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모든 사람에게 과거 조선시대 왕이 먹던 장을 먹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장맛을 되찾은 것이 생의 목표가 된 것이다. 이런 꿈, 참 멋있지 않은가. 그는 생전 어느 인터뷰에서 "일본은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된장·간장·청국장 만드는 법까지 가르친다, 우리는 어떤가, 사 먹는 법만 교육한다"며 "이대로 가면 몇 년 안에 일본 된장을 사다 먹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 같은 노인네라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우리 장맛을 지키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런 사실도 모르고 그냥 시골집을 개조하는 데 참조할까 싶어 방문한 수진원 농장에서 뜻밖에 고 정두화 회장의 소중한 정신을 만난 것이다. 고인의 고귀한 정신은 후세에 의해 잘 계승되고 있는 것도 참 소중한 일이다.
현재의 수진원 농장은 2006년부터는 고 정두화 회장의 둘째 아들이 농장 경영을 맡아 전통 장류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정연수 수진원농장 대표는 말표산업주식회사 대표이면서 주말에는 수진원농장에서 농군으로 변신해 엄청난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선친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수진원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인상 좋은 농장 관리 책임자는 이 농장의 유래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직접 장맛도 맛보게 해줬다. 관리 책임자는 정연수 대표의 동문으로 어떻게 하다보니, 이곳에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며 시종일관 성실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 역시 고 정두화 회장의 고매한 인품의 산물로 여겨졌다.
수진원에서 만든 된장과 간장은 그냥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얼이고 문화여서, 쉼없이 계속 내게 말을 건내는 것이었다(참고로 고 정두화 회장의 일화는 허영만 화백의 <동아일보> 연재만화 <식객> 86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해 더욱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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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로서 계간 '디카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으며, 베트남 빈롱 소재 구룡대학교 외국인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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